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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흠

金舜欽

1840. 12. 15 ~ 1908.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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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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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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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40년 12월 15일 아버지 김중관(金重瓘) 슬하에서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 수리(水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치화(穉華), 호는 죽포(竹圃)이다. 병자호란 당시 경북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경조(金慶祖, 1583~1645)의 8세손이다. 가문은 원래 안동군 풍북면(風北面) 오미동(五美洞, 현 풍산읍)에서 세거하였다. 오미동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김만수(金萬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을 역임한 김응섭(金應燮),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金祉燮) 등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다. 6세 때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8세에는 스스로 시문(詩文)을 지을 정도로 문장실력이 뛰어나 인근에 알려졌다고 한다. 12세에는 소학(小學)을 공부하여 충효를 근간으로 삼았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외출하여 늦게 귀가할 때는 동구 밖이나 고개 너머까지 마중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1868년 어머니를 여의고, 1876년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학문에 진력하여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학문이 널리 알려져 1894년 당시 경상감사였던 조병호(趙秉鎬, 1847~1910)가 경학원 강사로 추천하는 등 여러 차례 관직을 권하였으나 일체 거절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등으로 의병이 봉기하자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허위(許蔿, 1854~1908),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의병장 등과 의병 조직을 협의하고 예천·안동·의성 지역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였으나 끝내 창의하지 못하고 해산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예천(醴泉)으로 이주하여 10여 년을 보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이 되자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선포하는 등 항일의식 전개에 앞장섰다. 그리고 1907년 3월 이강년 의병부대가 제천에서 창의하자 넷째 아들 김낙문(金洛文, 1872~1942, 1992년 건국포장)을 이강년의 막하로 보내 단양·충주·청주전투 등에 참전하게 하였다. 김낙문은 의병 활동으로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대 강제해산 등 일제의 침략에 격분하였고, 1908년 재무서(財務署)에서 세금을 걷어 일본군에 납부한다는 사실을 알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였다. 그해 9월 3일 조상 묘소를 둘러보고 정비한 후 9월 6일부터 단식에 돌입하였다. 일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땅에서 나는 곡식과 과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입에 넣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시 「채미사(采薇辭)」의 운구에 맞추어 “용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캐도다. / 왜놈을 끌어들여 나라를 망치니 / 분명히 잘못된 일이로다. / 선왕과 선철을 잊지 못하니 / 내가 따라 돌아갈 곳 있으랴. / 아, 하늘이여 국운이 쇠하였도다.”라는 「서산가(西山歌)」를 지었다. 이 시는 나라의 국운이 다했으니 목숨을 던지겠다는 절절한 심정을 담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가 묵은 쌀로 밥을 짓고 도라지를 캐 울며 간청하기를 “곡식은 왜구 땅이 되기 전에 수확한 것이고, 나물은 왜구에게 세금을 내지 않은 새로 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며느리의 정성을 생각하여 약간 입을 대었지만 그 후 줄곧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자녀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남겼다. 장남 김낙용(金洛鏞)에게 “내가 죽거든 빈소를 차려 곡(哭)은 하되, 상식(上食)으로 상(床)위에 음식은 차려 놓지 말아라. 일제 치하에서 자란 곡식은 죽어서라도 먹을 수 없으니, 국권이 회복되는 날 상에 음식을 올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는 “어찌 남의 시비를 돌아보랴 / 다만 무엇이 의(義)인지 불의(不義)인지 밝힐 뿐 / 삶과 죽음을 말하지 말라 / 뜻에 적합해야 한다는 믿음뿐이니”라는 절명시(絶命時)를 남겼다. 단식 23일 만인 1908년 9월 28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甘泉面) 진평리에 안장되었다가 1963년 영주시 안정면 일원리 안정역 뒷산으로 옮겼다. 예천에서는 애국충절을 기리고자 1971년 남산공원(예천군 예천읍 남본리)에 ‘순국열사 죽포 김선생 기념비(殉國烈士竹圃金先生紀念碑)’를 세워 후대에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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