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중
金時中미상 ~ 1909. 7.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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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83년 8월 15일 강원도 정선군(旌善郡) 동면(東面) 고허리(古許里)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1907년 구국 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있던 중, 문경(聞慶)의 이강년(李康秊)이 영월(寧越)의 김상태(金尙台)와 같이 제천(堤川)·단양(丹陽)에서 재기를 결정하고 의병을 소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상태를 방문하여 의병에 투신하였다. 좌선봉장(左先鋒將)에 임명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마련하여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동년 10월 부하 120명을 이끌고 청풍(淸風)에서 의병과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1월 부하 200명을 이끌고 신돌석(申乭石) 의병진 300명과 합하여 경북 지역을 공략하여 일본군분견소와 경찰서 등을 파괴한 다음 의풍(義豐)으로 이동하였다. 신돌석 부대는 서벽(西碧)으로 이동하였다. 11월 영춘(永春) 동쪽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여 6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열이 무너지게 되어 죽령 일대에서 흩어진 병력을 모으며 의병부대를 수습하였다. 1908년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 이강년 및 김상태(金尙台) 등과 같이 경북 고두목에서 일본군과 싸워 패하였다. 이강년은 7월 2일 청풍(淸風) 북방 약 10리 지점에서 약 70명의 의병으로 일본군 제천수비대(堤川守備隊)와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이에 김상태가 통수권을 인계받았고, 이때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1909년 정선군 동상면(東上面) 노목리(櫓木里)에서, 6월에는 부하 약 50명을 거느리고 정선군 동상면 산내동(山內洞) 부근에서 군량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7월 이광주(李光州)와 함께 정선군 동중면(東中面)과 동상면(東上面) 일대에서 각 면장에게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군 연합 토벌대는 동상면 일대의 수색을 강화하였다. 사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자료에 따르면 1909년 7월 22일 정선군 동상면(東上面) 도세곡(道世谷)의 한 가옥에서 숙영 중이던 의병진이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크게 피해를 입었으며, 이 과정에서 대다수 의병이 후퇴하고, 의병장 김시중을 비롯한 의병 6명은 현장에서 일본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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