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태
金時兌1896. 11. 2 ~ 1979. 6.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5)
관련 사건
- · 흠치교(吽哆敎)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5) 1896년 11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한편,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98년 10월 8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강일순(姜一淳)이 1900년대 초에 창시한 흠치교(吽哆敎)의 교도가 되어, 1920년대 초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흠치교는 강일순의 호를 따서 증산교(甑山敎)라고 불리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신도들이 외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가 ‘훔치 훔치’로 시작하는 데서 훔치교(吽哆敎) 또는 흠치교(吽哆敎)라고 불렸다. 한말 동학(東學) 사상과 1894년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에 기원을 둔 흠치교는 일제강점기에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갔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측면이 강하여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그런데 1909년 강일순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 고씨(高氏)와 제자 차경석(車京石), 김형렬(金亨烈) 등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증산교를 모태로 선도교(仙道敎), 보천교(普天敎), 태을교(太乙敎),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 彌勒佛敎로 개칭),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 제화교(濟化敎, 三德敎로 개칭) 등 각지에 여러 교파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차경석을 교주로 한 보천교 계통의 조직에서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교주 차경석 아래에 60방주(方主)라는 고문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6인조-12인조-8인조-15인조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또 각각 30원-15원-10원-5원의 치성비(致誠費)를 내어 일부는 제사 비용에 쓰고, 나머지는 전라북도 정읍(井邑)의 본부로 보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도록 하였다. 당시 교도 사이에서 이 독립운동 자금은 고폐(告幣)라는 은어(隱語)로 불리었다. 교도들은 1924년이 되면 교주 차경석이 계룡산(鷄龍山)에 도읍하고 황제에 취임할 것인데 이때를 기하여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와 호응하여 일제히 일어나 독립운동을 개시하면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즉, 1924년까지 일본은 중국 또는 미국과 개전(開戰)하게 될 것이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국외 독립운동 기관과 연락하여 1919년 만세 운동 때처럼 일제히 일어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망 아래 신도들을 조직하고 운동 자금의 모집에 노력하였다. 1920년 (음)10월에 입도제(入道祭)를 지내고 흠치교에 가입하였다. 8인조에 가입하여 국권 회복을 결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윤치웅(尹致雄), 권병칠(權秉七) 외 5명에게 입교(入敎)를 권유하여 15인조에 가입시키는 등 신도를 모집하는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21년 2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4월 2일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4월 13일 기소되었다. 같은 해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하여, 같은 해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같은 사안으로 이미 경찰에서 즉결처분에 의해 이른바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으로 확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면소된 것이다. 호적에는 1979년 6월 20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 사망일은 1970년 1월 22일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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