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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한

金相漢

1878. 12. 30 ~ 194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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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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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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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9)

관련 사건

  • · 3
  • · 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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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9) 187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원황동(遠黃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3월 18일 병곡면 병곡동(柄谷洞)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영해면(寧海面) 장터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총 9개 면 가운데 6개 면에서 단속적(斷續的)으로 일어났다. 그중 영덕 북부의 3개 면, 즉 영해면·병곡면·창수면(蒼水面)의 시위는 경상북도 내에서도 가장 격렬한 편에 속하였다. 병곡면의 만세 시위는 영해면 만세 시위와 연동되어 전개되었다. 영해면 만세 시위는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 교회 조사(助事, 안수 받지 않은 목사) 김세영(金世榮)이 처음 제안하였으며, 그에 찬동한 낙평동 교회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과 병곡면 송천동(松川洞)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만세 시위는 영해면 장날인 18일을 기해 일어났다. 정규하·남여명(南汝明)·권영조(權永祚)·박희락(朴羲洛) 등의 선도에 따라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만세 시위는 영해경찰관주재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의 강압적인 해산 명령 이후 오히려 폭력적으로 변하였다. 시위대는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들을 구타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주재소를 비롯하여 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편소 등의 시설들을 차례로 파괴해갔다. 일부 군중은 정규하 등의 인도에 따라 병곡면으로 이동하여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영해면을 출발한 시위대가 병곡면으로 가는 도중에 합류하여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병곡동에 이르러서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 내 공문서와 집기를 훼손하였고, 건물 파괴에도 동참하였다. 병곡면의 시위 상황은 도망쳤던 일본인 순사가 평해 헌병분견소에서 파견된 헌병들과 합세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섬에 따라 급격하게 반전되었다. 시위를 지휘하던 정규하는 한국인 순사보들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군중의 피해를 우려한 정규하의 종용에 따라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튿날 만세 시위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오전 10시경에는 포항의 헌병대가, 오후 5시경에는 대구의 보병 80연대가 도착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 해산 이후 시위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이루어졌다. 이때 붙잡혀 심문 과정에서 정규하의 권유로 만세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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