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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원

金壽遠

1882. 12. 23 ~ 1936.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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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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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永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영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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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2년 12월 23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양산면(陽山面) 호탄리(虎灘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월 27일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내면(伊內面, 현 이원면) 이원시장(伊院市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 등이 주도한 이원장터 만세 시위에 김용이(金龍伊)·허량(許梁)·공재익(孔在翊)·조기시(曺奇矢)·최덕용(崔德用)·이금봉(李今奉) 등과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원헌병주재소(伊院憲兵駐在所) 헌병과 군청 직원들이 출동하여 약 700명의 군중에게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만세 시위는 지속되었다. 그러자 일본 헌병과 보조원은 태극기를 빼앗고, 주도자인 육창주와 허상기를 체포 구금하였다. 이에 시위 군중은 이원헌병주재소로 쳐들어갔다. 이원헌병주재소에 도착해서 시위 군중과 함께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돌과 몽둥이로 주재소와 헌병을 공격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이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이원헌병주재소 공격을 주도한 김용이와 허량 등이 체포당하였다. 오후 3시경 일제 헌병의 발포로 해산한 시위 군중을 다시 모아서 이원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해서 구금된 김용이를 석방할 것과 사격한 헌병이 나올 것을 큰 소리로 요구하며 돌을 던졌다. 그 다음 주재소에 침입하여 의자를 파괴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현관 등을 파괴하였다. 이원헌병주재소에 대한 공격은 오후 5시 반까지 지속되었고 일제 헌병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이원헌병주재소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보병 80연대 병력 5명과 대전수비대(大田守備隊) 병력 21명에 의해 오후 6시 반경 강제진압 당하였고, 그 과정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1919년 6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정치범 처벌령’ 위반 등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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