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구
金舜九1867. 10. 16 ~ 1919. 6.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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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67년 10월 16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군서면(郡西面) 하동리(下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옥천군 읍내(邑內) 시위, 3월 23일 청주군(淸州郡) 강내면(江內面, 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횃불시위, 3월 30일 미원장터 시위, 4월 8일 군서면 횃불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각 지방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본받아 자신의 고향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기획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옥천군 읍내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시위가 활발하지 못하자 청주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이어갈 것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23일 밤 청주군 강내면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을 들고 독립 만세 운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강내면의 18개 마을과 인접한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남이면(南二面)의 각 동리(洞里)도 이에 호응하여 횃불을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과 수비대가 청주와 조치원(鳥致院)에서 출동하여 강제 진압하였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새벽 1시경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횃불시위는 26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여파는 충남 연기군(燕岐郡, 현 세종특별자치시)은 물론 경기도까지 파급되었다. 1919년 3월 30일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5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나머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미원장터 시위 이후에 회인(懷人)의 학자 진(秦)씨 집에서 잠시 요양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1919년 4월 8일 오후 9시경 김교윤(金敎潤)에게 마을 주민을 모으도록 부탁하였다. 50여 명의 주민이 모이자 그들을 이끌고 박래현(朴來賢)의 집 부근 우물가로 가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다음 군중을 이끌고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 앞산 위로 올라가 모닥불을 피우고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에 오동헌병주재소(梧桐憲兵駐在所) 헌병과 옥천군수비대(沃川郡守備隊)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후 회인·문의(文義)·청주·괴산(槐山) 등지를 돌면서 다시 독립 만세 운동을 재개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군서면의 동지들이 붙잡혀 고문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였다. 옥천경찰서 앞에서 일제에 의한 강제 합병의 부당성을 공박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 무엇이 죄가 되느냐고 항의하다가 붙잡혔다. 1919년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혐의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공주감옥에서 6월 28일 옥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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