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태
金升泰1878. 6. 6 ~ 1940. 2.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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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78년 6월 6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장유면(長有面) 내덕리(內德里, 현 김해시 내덕동) 김해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시여(時汝), 호는 낙운(洛雲)이다. 김해 김씨 석성공파(石城公派) 김여해(金麗海)의 6세손으로, 부친은 김규환(金奎煥)이고, 모친은 조순남(趙順男)이다. 1919년 김해군 장유면 만세 시위를 준비해 이끈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김해군 3·1운동은 3월 1일 서울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했던 김종훤(金鐘烜)이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숨겨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김종훤이 찾아와 함께 거사를 일으키자고 제의하므로 흔쾌히 동의하였다. 4월 11일 이강석(李康奭)·최현호(催鉉浩)·조용우(趙鏞宇) 등 지역 인사들과 한자리에 모여 장유면 거사를 논의하였다. 거사 일을 4월 12일 무계리(茂溪里, 현 김해시 무계동) 장날로 정하고, 각자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주민을 규합한 후 무계리 장터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12일 아침 이강석과 함께 내덕리(內德里) 마을을 위·아래 마을로 나눈 후 주민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는데, 아랫마을을 맡아 시위 계획을 알리고 이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다. 12일 오전 10시경 주민들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무계리 장터로 갔다. 이강석 등 주민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시장까지 행진하였다.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김종훤 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이에 호응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무계리 장터 중심가를 행진하다가 헌병주재소까지 갔는데, 일본 헌병이 시위를 제지하며 총을 난사하였다.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오후 1시 반경 재집결하였는데, 헌병주재소를 포위한 후 투석하는 등 주재소 건물을 공격하였다. 김해헌병분견소에서 지원병이 도착해 또다시 발포하므로 시위 군중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선두에 서서 저항하던 손명조(孫明祚)·김용이(金用伊)·김선오(金善五) 세 사람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날 현장에서 붙잡혀 김해헌병분견소 유치장에 수용되었다가 4월 14일 부산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6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부산감옥소에서 옥고를 겪은 후 1920년 4월 14일 출소하였다. 모친 조순남 여사가 쓴 내방가사 「자식소회가」는 장유면 무계리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과 체포되어 재판받는 모습, 출소한 이후 일어난 일들을 일부 기록하고 있다. 1940년 2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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