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성
金演性1870. 5. 5 ~ 1909.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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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0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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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8) 1870년 5월 5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이담면(伊淡面) 유산리(杻山里, 현재 동두천시 생연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江陵)으로 판윤공파 35대손이다. 자는 범일(範一)이고 호는 송천(松川)이다. 아버지는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김병기이다. 일찍이 학문에 재능이 있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에도 국가정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동료들과 함께 ‘최근의 법규가 예에 어긋나는 것이 많으니 재고하기를 건의’하는 「헌의서(獻議書)」 등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1904년 4월 10일 성균관 박사에 임용되었으나, 같은 해 5월 10일에 의원면직하였다. 1907년 10월 1일에는 한성부 지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이미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항일운동에 나섰다. 특히, 1907년 8월 31일 발기인으로 「양주군이담유산국채보상취지서(楊州郡伊淡杻山國債報償趣旨書)」 를 발표하였다. 또한 1907년 8월에는 『대한매일신보』에 보조금 1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의병에 참여한 직접적인 계기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있었다.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에 저항하여 서울 시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가 확산되자 같은 해 9월에 경기 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봉기 초기에는 군자금과 병력 보충 등이 중요하였기에 지역을 확대하여 의병 소모(召募)활동을 전개하였다. 9월에는 경기 양주·적성 등지에서 전목기(全木基) 등이 의병부대에 가담하였고, 10월에는 연천 등지에서 유재만(柳在萬) 등이, (음)12월에는 포천 출신의 유문재(柳文在) 등이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이렇게 모집한 4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주·적성·연천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허위(許蔿) 의병장을 중심으로 결성된 경기의병에 참여하였다. 또 13도창의군의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이었던 권중희(權重熙) 의병장 휘하 부대로 서울진공작전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경기도 가평군 북면 도대리의 용소동(龍沼洞) 일대로 퇴각하였다. 이곳에서 방수장 체제를 통하여 가평 일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황순일(黃順一)의 권유에 따라 의병소모관(義兵召募官)으로 활동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인근의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선무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여러 마을로부터 각종 곡식과 피복을 공급받았다. 또 일본군의 동정에 대한 첩보를 지속적으로 듣고 있었다. 이러한 지원체계 속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겨울철을 보내며 재정비할 수 있었다. 1908년 봄이 오면서 일본군이 의병부대의 거점을 향해 연이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용소동 일대에도 3월 19일 일본군의 기습공격이 있었다. 같은 달 22일에도 일본군의 공격으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계속된 일본군의 공격으로 더 이상 이 일대에 머물지 못하고 북상하는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나와 양주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은 1908년 4월 양주 이담면 유산리, 안흥리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의 동향을 파악하면서도 이 의병부대를 이끄는 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다. 근거지인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포천·영평·강원 김화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 1월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이은찬(李殷贊)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은찬은 13도창의군의 중군장이었으며, 13도창의군 이후 허위와 손잡고 임진강 연합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1908년 6월 총대장 허위가 체포된 뒤, 이은찬은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10월부터 포천·영평·마전·적성 일대에서 각처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이 때 이은찬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도 의병부대에 대한 무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특히, 신식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은찬·윤인순 등과 함께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포천군·영평군·양주군·김화군 등지를 이동하면서 영국인으로부터 신식총기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무장력이 강화된 이후에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먼저 포천분견소를 공격하였다. 이어 양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유산리 헌병분견소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동시에 이 지역의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을 회유하는 활동도 하였다. 한편, 의병부대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에도 역량을 집중하였다. 군자금 모집을 위한 고시문을 배포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래 우리가 일본 군대와 자주 교전하여 이 때문에 탄약이 결핍되고 또 군자금을 소비했다. 그러므로 각 면장은 매호(每戶)로부터 금 30전(錢)을 징수하여 오는 20일까지 우리 의군(義軍)에게 가져와야 하며,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에 따라 처분한다.” 1909년 3월 정용대(鄭容大)와 함께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伊淡面)·어등산면(於等山面)·천천면(泉川面)·고주내면(古州內面) 4개면에 배포한 고시문으로 면장을 통해 각호에 군자금을 배당하고 있었다. 이는 행정체계 속에서 세금 형태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시문 배포 이후 양주군 일대에 대한 일본군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3월말 이은찬도 체포되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한 뒤 부하들을 이끌고 장단군을 경유하여 삭녕군(朔寧郡)으로부터 토산군(兎山郡)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근거지를 완전히 이동한 것은 아니었고, 양주군 일대의 일본군 경계가 약화되길 기다려 돌아올 계획이었다. 1909년 4월 이후에는 양주·마전·연안·평산 등 경기·황해·강원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1909년 11월 29일 평양공소원에서 교형(絞刑)을 받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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