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永相
永相1836. 3. 18 ~ 191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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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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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군(古阜郡) 수금면(水金面) 산북리(山北里, 현 정읍시(井邑市) 정우면(淨雨面)) 출신이다. 1836년 3월 18일, 김경흠(金景欽)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도강(道康), 자는 승여(昇如), 호는 춘우정(春雨亭), 이명은 김승화(金昇和)이다. 1851년 전북 정읍군 칠보면(七寳面) 무성리(武城里)로 이주하였다. 자라면서 증조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만났다. 만년에는 동생 김영렬(金永烈)과 함께 홍직필(洪直弼)의 직계 제자인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소휘면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통탄하여 시골에 은거하면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던 인물로, 선공감역·전라도사·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일체 취임하지 않고 외세와 타협하지 않는 척사(斥邪)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스승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외세와 타협하지 않고 국망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등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비상시에 먹을 약을 항상 갖고 다니며 죽음을 대비하였다. 이후 시골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906년 당시 8대조 김관(金灌)이 배향된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장의(掌議)를 맡고 있었다. 이때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창의(倡義)하자 손자 김균(金均)과 함께 참여하였다. 의병 거의를 위해 최익현과 여러 차례 만나 논의하였고, 지역의 유생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6월 4일 의병이 거의하자 총참모장이 되어 창의문을 낭독하고 의진과 함께 출전하였다. 그러나 70세의 연로한 나이로 신병이 있어 최익현이 전북 순창(淳昌)에서 붙잡힐 때에는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지역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은사금(恩賜金)을 교부하였다. 그 해 11월 고부면장을 통해 은사금을 받아가라는 통지가 왔다. 이에 “나는 대한의 신민(臣民)이다. 어찌 원수의 돈을 받을 수 있겠느냐”면서 세 차례나 거절하였으나 일제는 계속 회유하였다. 면장이 끝까지 은사금을 받아가라는 안내장을 보내자 “나는 당당한 대한의 선비이다. 어찌 일본인의 돈을 받았다는 문서에 이름을 올리겠느냐”하면서 이름이 쓰인 문서를 찢어 버렸다. 1911년 4월 일제 헌병대장 아츠미(渥美善四)가 찾아와 은사금을 주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를 거절하자 5월 1일 일제 헌병에 붙잡혀 정읍 동곡(東谷) 역참에 구금되었다. 구금 후 군산감옥으로 이송되던 중 전북 김제시(金堤市) 청하면(靑蝦面) 동지산리(東之山里)의 만경강 어귀 신창진(新倉津, 일명 사챙이) 나루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게 되었다. 나룻배가 만경강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남몰래 허리띠에 「절명시(絶命時)」 를 써 남기고 순식간에 물속에 투신하였다. 이때 호송하던 헌병 사이토(齋藤)가 급히 뛰어들어 구해내 끝내 군산감옥으로 이송·수감되었다. 군산감옥에 투옥되자 단식에 돌입하여 9일 만인 1911년 5월 9일 사망하였다. 시신 수습과정에서 허리띠에 쓴 “옛날 굴자(屈子)의 지조와 충성은 / 멱라수(汨羅水)를 가리키며 죽음을 기원했지. / 지금 봄비에 나는 재난 만나 / 초주(椒酒) 세 잔 따라 / 고기 배 속의 충혼을 위로하네 / 동해로 숨어버리려는 발자취 따라 / 영원히 물가 바위에서 영혼 오르내리리라.”이란 절명시 일명 「의대찬(衣帶贊)」 이 발견되었다. 1927년 문인들이 정읍군 칠보면(七寳面) 무성리(武城里) 원촌마을에 사우(祠宇)를 세워 배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심한 감시로 위패도 모시지 못하였다. 해방이 된 1945년 10월 위패를 봉안하고 사우의 이름을 필양사(泌陽祠)라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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