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永權
永權1868. 11 ~ 1909. 11.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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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출신이다. 1909년 판결문에 42세, 11월생으로 기재된 것을 볼 때, 1868년 11월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주소는 함경남도 갑산군 상남사(上南社) 황토리(黃土里) 고암동(高岩洞)이었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함경도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여러 차례의 의병활동이 전개되었으며, 1907년에 이르러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전쟁이 활발해졌다. 홍범도는 평민으로 평남 평양의 진위대(鎭衛隊) 출신이었다. 함경도로 이주한 뒤 포수와 광부로 일하던 중 1907년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 등과 더불어 산포수를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홍범도 의병의 경우 의거 초기에는 안산사 포계(砲契)의 산포수가 주축이었다. 하지만 의거 목적 자체가 산포수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었고, 함경도 지역 민중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부대에 유학자로 지칭되는 지식인층과 해산 군인·광산 노동자·농민 등도 뜻을 같이하였다. 이로 인해 홍범도 의병은 급격히 양적 팽창을 하게 되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2일 후치령 전투를 시작으로 1909년 5월 4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삼수군(三水郡) 신갈파진을 거쳐 중국 퉁화(通化)로 건너가기까지 일본 군경과 총 37회의 격전을 벌였다. 불과 만 2년이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제의 한국 침략정책에 많은 피해를 가하였다. 일제는 홍범도 의병부대 등 함경도 지역 의병을 탄압하기 위하여 현지에 일본군을 증원하는 등 초기부터 군사적으로 강력히 대응하였다. 1908년 6월~7월 말 일본군의 이른바 ‘의병토벌작전’으로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함경도 지방 의병대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홍범도는 심각한 탄환 부족으로 의병투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1908년 (음)10월 초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홍범도 부대는 (음)10월 9일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퉁화(通化)로 이동하였다. 홍범도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박모(朴某)가 당시 친일단체로서 가장 맹위를 떨치던 일진회(一進會)의 회원임을 알고, 1908년 1월 19일((음)12월 16일) 체포하여 함경남도 갑산군 상남사 황토곡(黃土谷) 창동(倉洞)에서 처단하였다. 다음 날인 1월 20일에도 일진회원 김수동(金水洞)과 27세 된 그의 아들을 붙잡아 다른 곳으로 연행하던 중 상남사 작령(鵲嶺) 고갯길에서 처단하였다. 이처럼 친일파 처단 활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09년 8월 13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9월 20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음 날 대심원(大審院)에 상고하였으나 10월 4일 역시 기각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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