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린
金英麟1914. 9. 8 ~ 2003. 9.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민족혁명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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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4년 9월 8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하면(楊下面) 시남리(市南里)에서 태어났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이름이 '김영린(金永麟)'으로 표기되어 있다. 1928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32년 조상섭(趙尙燮) 목사의 상점에서 일하면서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 때 김구(金九)가 안창호(安昌浩)에게 보내는 긴급연락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거 이후 일제의 검거를 피해 난징(南京)으로 피신하였고, 독립운동가 임득산(林得山)이 태평로(泰平路) 118호에서 경영하는 만년필 제조·판매점의 점원이 되어 그 집에서 기숙하며 일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그 해 11월 임득산 등과 함께 난징을 떠나 충칭(重慶)으로 갔다. 중도 경유지인 쓰촨성(四川省) 스바오자이(石寶寨)에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주최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였다. 1938년 3월 중순 충칭에 도착한 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충칭구당부(區黨部)에 소속되었다. 동년 7월부터 1939년 3월경까지 매월 1회씩 소량자가(小樑子街)에 있는 임득산의 상점에서 열리는 제2소조회(小組會) 모임에 참석하여 진가명(陳嘉明, 본명 (崔章學))·서재현(徐載賢) 등과 함께 당 조직 관련 제반 사항을 의논하고 국제정세 보고 청취와 시사문제를 토의 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38년 5월 1일의 메이데이 계기 항일시위와 8·29국치기념일 행사에도 참가하였다. 그 후 1945년 해방 때까지 줄곧 충칭에서 임득산의 대공상점(大工商店)에 근무하며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에는 당 감찰위원을 지냈다. 1946년 12월 4일 귀국 한교(韓僑) 304명 대오의 일원으로 상하이를 떠나 환국하였다. 서울에서 거주하다 2003년 9월 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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