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永輝
永輝1903. 10. 10 ~ 1970. 12.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해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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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3년 10월 10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마산면(馬山面) 송석리(松石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기룡(金寄龍)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18살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4월 4일 해남면(海南面) 거리에서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 김규수(金奎秀)로부터 학생들 사이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같은 날 해남공립보통학교 기숙사로 가서 학생인 박동열(朴東列), 임영식(任永植)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날 밤 기숙사에서 숙박하였다. 이튿날인 4월 5일에도 기숙사에서 만세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을 박동열의 방으로 모이게 하여 다음날인 4월 6일 해남 장터에서 만세시위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또한 김규수에게 태극기와 격문의 제작에 필요한 종이와 먹, 그리고 물감 등을 사도록 하였다. 이어 해남공립보통학교 재학생과 해남군 옥천면(玉泉面) 백호리(白虎里)에 사는 김영문(金永文)의 집에 가서 해남보통학교 졸업생을 불러 모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1919년 4월 6일 해남면 장날을 기해 오전 10시부터 3시까지 장터에서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이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장터에 모여든 학생이나 군중의 숫자가 적고 일본 경찰의 감시로 인해 시위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오후 3시 무렵 해산되었다. 이때 시위장소에 도착하였으나 부친의 귀가 권유로 정작 시위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7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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