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玉兼
玉兼1892. 3. 19 ~ 1957. 8.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동래군 구포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2년 3월 19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하동면(下東面, 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德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부산 구포(龜浦)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3월 20일 동래군 구포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구포면의 만세시위는 구포 출신으로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이던 양봉근(楊奉根)이 귀향해 구포면 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임봉래와 구포의 유지인 윤경(尹涇)·유기호(柳基護) 등으로부터 구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시위 준비에 동참하였다. 3월 27일과 28일 주민들과 함께 구포리 박영초(朴永初)·이수연(李守蓮)의 집에서 모여 논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에 의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 수백 매를 제작하였다. 3월 29일, 구포 시장에 모인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晋泰)·김장학(金章鶴) 등 청년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정오에 구포시장에 운집한 1,0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윤영태(尹永台) 면장에게 “조선인인데도 왜 시위운동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출동한 일본 군경에 붙잡혔다. 오후 3시경 주도 인물의 체포 소식을 전해 들은 주민들은 구포주재소로 달려갔다. 1,200명이 넘는 시위 군중은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먹과 곤봉으로 구포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투석으로 대항하며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해산하였다. 그 결과 1919년 7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3년 5월 고베(神戶)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검속 당하자 이듬해 귀국하였다. 2·8독립선언 대표 중 한 사람인 김철수(金喆壽)와 함께 양산(梁山) 지방을 근거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