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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頓

玉頓

1889. 2. 2 ~ 1975.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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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玉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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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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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평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2월 2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박곡동(朴谷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안평면 대사동(大司洞)에 거주하면서 대사동 교회 영수로 활동하였다. 안평면에서는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안평면의 만세시위는 대사동 우리골(尤利谷)에서 시작되었다. 3월 11일과 12일 이종출(李鍾出)과 만나 만세시위에 대해 협의한 뒤, 15일 낮 대사동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60~70명에 이르는 교인과 주민들이 동의함으로써 만세시위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교인들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등 적극적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5일 이들과 함께 저녁 7시경 마을 뒷산에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밤 10시경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16일 50~60명의 교인과 주민들은 밤 8시경 마을 앞 밭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가 위치하는 창길동까지 행진한 후 해산하였다. 17일에도 150여 명의 주민들이 우리골에 모였고, 주재소 앞에 모였을 때는 400여 명에 이르렀다. 15일과 16일에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경찰이 이날부터 탄압에 나서면서 12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만세시위는 18일에도 계속되었다. 대사동 주민 300여 명은 우리골에서 만세를 부른 후 마전동·기도동·창길동·박곡동·괴산동 등 안평면의 곳곳을 행진하였다. 3월 19일은 도리원의 장날이었다. 이에 이종출 등과 함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규합하는 한편, 의성경찰서까지 진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일 아침부터 도리원시장에 가는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도리원시장으로 향하였다. 행진 도중 주민들도 가세하여 시장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의 규모는 이미 1,000명을 넘어섰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즉각 해산을 강제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구에 있는 일본군 80연대 군인들까지 해산에 투입되면서 체포되고 말았다. 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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