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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完水

完水

188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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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完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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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英陽)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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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이다. 생몰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판결문에 따르면 1908년 당시 20세였으므로 1889년생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소지는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읍내면(邑內面) 서부동(西部洞)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가 소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 성익현(成益鉉) 부대에 참여하였다. 1907년 7월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8월 대한제국군마저 강제 해산 당하면서 나라가 무너져가는 위기 속에서 항일의병은 최고조기에 달하였다. 특히 충북·강원·경북의 접경지대인 소백산맥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다. 강원도 춘천(春川) 출신 성익현은 1907년 7월 창의하여 스스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 되어 휘하에 정경태(鄭敬泰)를 도총장(都總將), 변학기(邊鶴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部將)으로 임명하여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三陟)·울진(蔚珍)·평해(平海), 경북의 영덕(盈德)·봉화(奉化)·안동(安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4월부터 성익현 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직후였다. 이 작전에 참여했던 이강년(李康秊) 부대가 강원에서 경북 봉화 지역으로 들어오자 성익현 부대는 이강년 부대, 김상태(金相泰) 부대와 연합하였다. 1908년 5월 11일 의병 약 1,000여 명과 함께 안동군(安東郡) 애곡동(猚谷洞)에서 일본인과 한인들로 구성된 순사들과 접전 중 일본군 수비대의 지원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같은 달 15일 이강년을 비롯한 변학기·성익현·김상태·정경태 등이 이끄는 의병 1,000여 명이 봉화군 서벽리(西壁里)에 주둔하였다. 이때 영천(永川)수비대 등 일본 군경이 공격해 오자 이를 격퇴하고 봉화군 내성(乃城)으로 퇴각시켰다. 이강년의 우군장 변학기, 성익현, 김상태, 정경태, 백남규(白南奎), 정연철(鄭蓮哲) 등이 이끄는 의병 연합부대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내성까지 진격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내성 헌병분견소와 주재소의 헌병과 순사 20여 명 외에 예안(禮安)·영주(榮州)·예천(醴泉)·안동 등 여러 지역에서 지원·파견된 40여 명의 일본군경이 주둔해 있었다. 같은 해 5월 18일 내성면 황매리(黃梅里)에 있던 의병 1,200명이 봉화 내성을 공격하여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격전을 치른 뒤 황매리로 회군하였다. 이 전투에서 20여 명의 의병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 후 일본 군경은 황매리로 의병들을 추격하였다. 이에 오록(梧麓)으로 퇴각하였는데, 당시 그곳에 집결한 연합 의병은 약 1,200명이었다. 5월 19일 일본 군경과 다시 한 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각자 부대의 근거지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 붙잡혀 1908년 9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형 10년을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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