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龍基
基1876 ~ 1909. 7.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평산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황해도 배천(白川) 출신으로, 1909년 당시 34세였으므로 1876년생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 육군 기병 출신으로 1907년 8월 군대 해산과 함께 의병으로 나섰다. 일제는 7월 20일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7월 24일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한 상황에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고, 8월 1일에는 서울의 시위대, 8월 3일에서 9월 3일에 걸쳐 지방 8도의 진위대를 해산시켰다. 1907년 10월 이인재·왕회종(王會鐘) 등 해산 군인들과 함께 7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황해도 유목동에서 일본군과 싸움을 치렀다. 12월에는 유인석(柳麟錫)의 문인 박정빈(朴正彬)의 평산의진(平山義陣)에 합류해 창의돌격대(倡義突擊隊) 총대장을 맡았다. 이때 해산군인 출신의 김덕순(金德順)·지홍일(池洪一)·박계석(朴啓石)·조인선(趙仁善)·고부성(高夫成) 등 수십 명과 함께 활약하였다. 1907년 12월에 경기도 양주(楊州)에 각도에서 약 1만 명의 의병들이 집결하여 이인영(李麟榮)을 13도 창의대장(十三道倡義大將), 허위(許蔿)를 군사장(軍師長)으로 하여 서울 진격을 계획하였다. 1908년 1월 박정빈이 13도연합의병부대의 진동유진소(경기·황해) 진동창의대장 허위(許爲)의 아장과 교남의병대장을 맡을 때 그 휘하에서 서울진입작전에 참가하였다. 서울진입작전 이후 허위가 연기우(延基羽)·강기동(姜基東) 등과 강화 진위분견대 봉기군과 합류해 임진강 유역에서 의병전쟁을 벌여 나갈 때 권준(權俊)·왕회종 등과 함께 임진강과 강화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7월 강화도 교동군(喬洞郡)·석모로도(席毛老島)·풍덕군·개성군 등지로 무대를 넓혀가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8월 무렵 강화도의 말도(末島)·망도(望島)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한편 연안 진천포(鎭川浦)에서 지홍윤 의병부대의 군복을 제조하는 재봉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황해도 연안과 강화도 일대에 이르는 해상활동도 펴 나갔다. 1908년 8월 조인선 등 수십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해안에 머물던 일본인 어선과 기선을 습격하였고, 석포(石浦)에서 밀정 송대현(宋大鉉)과 양학진(梁學辰) 등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9월 2일 서울에 잠입하던 중 밀정 홍병수의 밀고로 붙잡혔다. 1909년 3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받아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30일 경성공소원과 5월 20일 대심원에서 각각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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