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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익

金溶益

1886. 2. 14 ~ 197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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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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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晋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진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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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중흥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86년 2월 14일 경상남도 진주군 명석면(鳴石面) 남성리(南星里)에서 아버지 김사성(金士聲)과 어머니 진양 정씨의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자는 석홍(碩弘), 호는 호산(湖山)이다. 의령 남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4남을 두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진주군 진주면(晉州面)에서는 김재화(金在華)·박진환(朴進煥)·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 등의 주도로 3월 18일 진주면 장날 오후 1시 비봉산 위의 나팔소리를 신호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국권회복과 민족의 복수를 주창한 격문을 배포하고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구한국 태극기를 앞세우며 행진하며 시위하였다. 이에 호응하며 모인 시위대가 오후 4시경 경상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 군중은 약 3만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군 헌병과 경찰은 저녁 무렵 약 300명을 붙잡았다. 이후에도 시위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이시위에 참가하여 명석면민 수백 명을 인솔하고 진주 남문에 이르러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 직전에 빠져나와 산속에 은신하였다. 이후 평북 영변 출신 대한독립중흥단(大韓獨立中興團) 단원 선경환(宣璟煥)이 단원과 군자금 모집 차 국내로 잠입한 것을 계기로 만나 권총 1자루를 수령하였고, 이 때 항일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그와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에 나섰다. 1921년 9월 20일 선경환과 함께 산청 단성면 소남리 유지 조현용(趙顯瑢) 집에 침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이라 하며 군자금 모금 중이라 밝히고 거부하는 자는 국적(國賊)이니 사형선고장을 받으라고 하며 권총으로 위협하고 130원 가량을 징수하였다. 이후 9월 23일 선경환과 함께 도산면(지금의 신안면) 장죽리 이원규(李源奎) 집에 침입해 같은 방법으로써 군자금 1만원을 요구하며 거절하면 총살한다고 위협하여 80원을 징수하고 물러났다. 이후 협천군 지역에도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자 산청경찰서에서 대대적 수색에 나섰다. 9월 28일 오후 생비량면 가계리로 이동하던 중 이를 탐지한 생비량면 가계주재소 순사 정안찬(鄭安贊)에게 총격을 당했으나, 즉시 권총으로써 응사하여 순사를 기절시키고서 합천 쪽으로 계속 북진하였다. 산청경찰서 서원이 전부 출동하여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선경환은 이후 10월경 영변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도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922년 1월경 진주경찰서 경찰에게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진주지청 검사국으로 압송되었다. 그 해 3월 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6년을 받고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4년 4월 진주지청 검사분국으로부터 4년 6개월로 감형 처분된 통지서를 받은 뒤 1925년 10월 풀려났다. 고문후유증과 3년 9개월 간 옥고 중 얻은 병으로 한평생 장애인으로 살다가 1970년 3월 10일 85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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