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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佑林

佑林

1896. 5. 26 ~ 1978.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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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佑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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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宜寧)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의령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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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파리장서 사건(제1차 유림단 사건)
  • · 제2차 유림단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96년 5월 26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궁류면(宮柳面) 운계리(雲溪里, 당시 합천군 궁소면 어촌리)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을 지냈던 매서(梅西) 김극영(金克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字)는 이회(而晦), 호(號)는 중재(重齋)이다. 이후 김황(金榥)으로 개명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부친이 산청(山淸)의 산골마을인 단성현(丹城縣) 만암리(晩巖狸)로 이주하였다. 활동 당시 본적은 경남 산청군(山淸郡) 신등면(新等面) 상법리(上法里)였다. 이곳에 성지정사(聖智精舍)를 짓고 부친과 함께 글을 읽었으며,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제강점기 유림(儒林)들이 주체가 되어 1919년 파리강화회의(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과 1920년대 중반 김창숙(金昌淑) 등이 중심이 된 국내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 두 사건은 당시 각각 ‘제1차 유림단(儒林團) 사건’과 ‘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다. 파리장서운동이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제정세의 분위기가 개조(改造)되는 상황과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유림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보낸 독립청원운동(獨立請願運動)을 말한다. 일제의 강제병합 이전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곽종석·김창숙·김복한(金福漢)을 비롯한 137명의 유림이 서명하였는데, 이때 작성한 서한은 현존(現存)하지 않는다. 이 서한은 당시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던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국내 각지에도 우송되었다. 파리장서운동 과정에서 곽종석·김창숙·윤충하(尹忠夏) 등과 함께 독립청원서 작성 준비에 참여하여 연락·교섭 등 실질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곽종석의 지시로 서울로 올라와 김창숙과 함께 정세를 파악하면서 파리장서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파리장서 운동을 시작할 때, 이들은 서명한 인사들이 모두 투옥되더라도 활동을 지속하기 위하여 중심인물 가운데 일부는 서명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 때 김창숙 등과 함께 제2진에 포함되어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어 단성헌병대(丹城憲兵隊) 유치장에 구금된 지 7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스승인 곽종석의 문집(文集)을 간행하기 위해 서울에 간행소(刊行所)를 설치하고 간역(刊役)을 맡았다. 한편 파리장서 사건 이후 상하이로 망명한 김창숙은 1925년 1월에 동지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함께 영남지방의 부호(富戶)들을 대상으로 20만 원의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같은 해 3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 협의한 결과, 모집한 군자금으로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未墾地)와 황무지(荒蕪地) 20만 정보(町步)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만주지역의 한인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즉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 달성을 준비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 아래 1925년 김창숙이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할 때 서로 연결되어, 산청·진주(晋州)·의령(宜寧)·거창(居昌) 등지의 유림들을 대상으로 연락과 군자금 모집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 김창숙은 유학자 곽종석의 문집 출판을 위해 각지의 유림들이 서울로 모이는 것을 계기로 이들을 통해 국외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것이었다. 서울에 머물면서 문집 간행소의 간역을 맡았던 관계로 이와 같은 김창숙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었으며, 이후 경남 일대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경남의 부호 조현규(趙顯奎)·하영진(河泳鎭) 등에게 군자금 1만 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2만 원을 요청했던 이길수(李吉洙)로부터 10월 19일에 6백 원을 모집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26년 3월 말경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에 붙잡혔다. 이때는 이미 김창숙이 국내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가지고 김창탁(金昌鐸)과 함께 중국으로 떠한 직후였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40~50명의 유림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오랫동안 취조를 받고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총포화약류단속령(銃砲火藥類取締令) 위반 등으로 기소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1일 구류취소로 풀려났다. 1927년 1월 21일 부로 예심(豫審)이 종결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1928년 산청군 신등면 내당촌(內塘村)으로 이주하여, 사망할 때까지 진주·산청 등지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등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일제 말에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할 때도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끝까지 보발(保髮)하여 전통 유림의 모습을 고수했으며 자녀들도 식민지 교육기관에는 보내지 않는 등 민족적 지조를 지켜 나갔다. 1978년 12월 14일 내당서사(內塘書舍)에서 사망하였다. 자신이 지은 사례수용(四禮受容)에 의거하여 유월장(踰月葬)을 거행했는데, 참석한 유림이 3,000여 명에 달하고 접수된 만사(挽詞)와 제문(祭文)이 700여 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저서로는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역대 경학(經學)에 대한 『쇄기(瑣記)』·『효경장구(孝經章句)』, 예학(禮學)에 관한 『사례수용(四禮受用)』, 역사에 관한 『동사략(東史略)』·『역년도첩록(歷年圖捷錄)』·『독립제강(獨立提綱)』·『환영대조(寰瀛對照)』(연표), 시문집인 『익붕당총초(益朋堂叢鈔)』, 그리고 『일기(日記)』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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