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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庸濟

庸濟

1878. 10. 26 ~ 193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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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庸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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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안악(安岳)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안악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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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민회
  • · 면학서포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05인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78년 10월 26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안악면(安岳面) 남암리(南岩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용제(金容濟)이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후 황해도 안악과 신천(信川) 등지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 2월 안창호(安昌浩)가 귀국한 뒤,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자, 황해도 지역에서 김구(金九)·오택의(吳宅儀)·편강열(片康烈)·최명식(崔明植)·도인권(都寅權)·김홍량(金鴻亮)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8년 고향에서 면학서포(勉學書鋪)를 운영하면서 구국강연회와 하기강습회 등을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9년 가을 최명식 등과 함께 만주지역 번시현(本溪縣)·환런현(桓仁縣)·지안현(輯安縣) 등을 돌며 독립운동기지 물색에도 나섰다. 이어 1909~1910년 사이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대 애국인사들이 결집될 때 참여하였다. 이들과 함께 매국적(賣國敵) 이완용(李完用) 등을 처단하고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양병학교(養兵學校)를 설립할 뜻을 세우고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황해도 일대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0년 12월 평양역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안명근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동년 11월부터 황해도 지역 애국인사 160여 명과 함께 피의자로 구속되었다. 구속 후 ‘강도 및 강도미수’ 피의자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혐의 내용은 황해도 안악읍내 재산가들로부터의 자금 징발을 위해 자산가의 명단, 자산의 과다(多寡), 헌병분견소의 위치, 일본인 거주자와 자산가의 거동 등을 정찰하였다는 것과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다는 것이다. 군자금 모집 계획은 1910년 11월 20일 밤 최명식, 김익연(金益淵)·장윤근(張倫根) 등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자산가 원명락(元明烙)·원정주(元楨周)·원정균(元楨均)·최약권(崔若權)·김계수(金桂守) 등의 집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밤 11시경 남산(南山) 습낙현(習樂峴)에 불과 몇 명만 모이고, 읍내 자산가들도 음력 12월 이전에는 거액의 현금을 소지할 수 없다고 함에 따라 12월 15일로 실행을 늦추었다. 그런데 실행을 눈앞에 두고 안명근 등 주모자가 붙잡히면서 ‘강도미수’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최익형(崔益馨)·최명식 등 8인과 함께 징역 7년을 받았다. 본 사건에 피의자 160여 명 중 18명이 ‘내란미수·모살미수·강도 및 강도미수죄’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40여 명은 거주지 제한을 받았다. 이 재판은 궐석재판으로 재판과정에서 피의자들의 진술은 물론 변호사의 변론도 없이 진행된 불법 재판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이어 1911년 10월 ‘105인 사건’이 일제 경찰당국에 의해 조작, 날조되었다. 안악사건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 피의자로 재차 지목되었으나 기소자 123명에는 제외되고 불기소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신천과 안악 출신인 고정화(高貞華)·도인권· 이승길(李承吉)·배경진(裵敬鎭)·최중호(崔重鎬) 등과 함께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나 안악사건으로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감옥에서 김구와 함께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김구가 후사(後嗣)가 없어 걱정하자, 자신은 4남 1녀가 있으니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내 김구의 대를 잇도록 제안하였다. 또한 옥중 생활 중 옴에 옮아 동지들과 떨어져 옴 환자들만 수용한 옴방으로 옮겨지자 동지 최명식은 바늘로 팔다리에 상처를 만들어 옴이 옮은 것처럼 해서 옴방으로 옮긴 일도 있었다. 1915년 8월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가 김구·최명식과 함께 자신들이 공들여 운영했던 양산학교와 면학서포를 찾아갔으나, 양산학교는 일본이 운영하는 공립보통학교로 넘어갔고 면학서포는 문이 닫혀 있었다.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 승하 시 김구는 추도회 개최를 제안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해 3월 만세시위가 서울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악에서 김용진(金庸震)과 함께 김구와 최명식 등을 안악으로 모이라고 전갈하였다. 초청 인사들이 모이자, 김용제와 함께 “이번 서울의 만세사건이란 미국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해서 우리도 이 기회에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일제에 대하여 반항운동을 일으키고 한편으로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세계에 선포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예정으로 국내 각지에서 많은 대표가 참가하기를 희망한다는 서울로부터의 소식이 있다”고 전하며 김구와 최명식 등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권고하였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임시지방연통제(臨時地方聯通制)가 실시되자, 1920년 12월 안악군에도 연통부(聯通府)가 조직되었다. 이때 안악군 참사(參事)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1년 2월 2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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