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종
金宇鍾1905. 10. 21 ~ 1993. 10.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기독청년학생구락부(기독동우회)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조선민족혁명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조선민족혁명당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5년 10월 21일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서면(西面) 모곡리(毛谷里)에서 김기호(金基鎬)와 이인자(李仁慈)의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벽파(碧波)이다. 7세부터 고향의 서당에서 한문수학을 하였고, 1923년 3월 사립 모곡학교[일명 보리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학교는 1919년 9월 낙향한 계몽운동가 한서 남궁억(南宮檍)이 교회를 세우고 그 건물에 문을 연 곳이다. 재학 시절 남궁억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배웠고, 기독교에 입문하여 세례도 받았다. 졸업한 그 해 서울로 올라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1월 19일 서울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朝鮮基督敎靑年會館, , YMCA) 옥상 방에서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 등 10여 명과 함께 기독청년학생구락부(1919년 기독동우회(基督同友會)로 개칭)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32년 3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연희동에 동민학교(洞民學校)를 설립하여 한글과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33년 6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경찰서에서 29일간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풀려난 후 1933년 8월 중국으로 건너가서 난징(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1934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최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이후 최동오(崔東旿, 1892~1963) 등 임시정부 요인과 접촉하며, 그 해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독립운동가의 자녀교육을 담당하였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5개 정당이 통합하여 결성된 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관계하였다. 1936년 6월 진링대학을 졸업하고 귀국을 준비하던 중 8월 초 최동오와 만나 종교계 중심의 애국청년 규합과 뤄양(洛陽) 군관학교로의 청년 밀파 등 비밀지령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23일 경 부모님이 있는 전남 목포로 돌아왔으나, 9월 초 중국에서의 활동이 발각되어 목포경찰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9년 2월 풀려난 이후 평양 소재 성화신학교(聖化神學校) 교사, 평양 남산현 교회 부목사, 강서군 소재 가현교회 목사 등을 거쳐 1943년 춘천으로 이사하여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강원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강원도 반민특위 위원장 등을 지냈고, 강원일보 전신인 팽오통신(彭吳通信)을 창립,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71년부터 1991년까지 강원일보사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또한 1958년부터 세계도덕재무장운동(MRA)의 한국대표로 활동하면서 한국 MRA를 정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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