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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又鐵

又鐵

188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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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又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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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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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북면(臨北面) 미질리(美質里, 현 안동시 예안면 미질리) 출신이다. 당시 판결문 기록에 의하면 1907년 26세로, 1882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부터 박처사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벌였다. 박처사(朴處士)는 안동의 임동면(臨東面) 대곡리(大谷里) 출신의 박인화(朴仁和)로 추정된다. 박처사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의병을 일으킨 바 있다. 1907년 후기의병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예안과 안동·진보·영양 등지에서 소규모 유격대 형태로 활동하면서 인근의 유시연·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특히 유시연(柳時淵)은 박인화의 고향과 인접한 임동면 수곡리(水谷里) 출신이었던 까닭에 박처사 의병부대와 유시연 의병부대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20~30명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유격대의 형태로 활동하였다. 1907년 2월 박처사 의병부대와 유시연 의병부대는 연합하여 예안분파소(禮安分派所)를 공격하고, 9월 10일에는 영양군과 안동군의 접경지에서 순사 고모리(小森) 일행을 공격하여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즈음인 1907년 11월에 박처사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참여 이후 일본군 수비대는 영남의 유시연·신돌석(申乭石)·김성운(金成雲) 의병부대와 함께 박처사 의병부대를 탄압하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였다. 그럼에도 박처사 의병부대는 1908년 1월부터 일본군 무장 수비대와 지속적인 교전을 펼쳐 나갔다. 안동군 임동면의 편항(鞭巷, 현 임동면 중평리)에서 1908년 1월 일본 경찰대와 처음 교전을 벌인 후 친일 자위단장(自衛團長) 유유호(柳溜鎬)를 구타하며 경찰의 포위망을 뚫었다. 이어 1월 21일에는 진보군(眞寶郡)으로 이동하여 기곡동(基谷洞, 현 청송군 진보면 기곡리)에서 일본 군경과 교전하였고, 2월에는 예안·안동·의성에서 유격대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2월에 전개된 일본군 수비대의 유시연 의진 탄압작전과 맞물려 박처사 의병부대의 입지도 점차 좁아졌다. 이 작전으로 유시연 의병부대 상당수가 사망하거나 붙잡혔고, 또는 귀순하여 의병부대의 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와 더불어 박처사 의병부대도 상당수가 항전 과정에서 상당한 사상(死傷)을 당하거나 귀순하였다. 결국 박처사 의병부대도 유시연 의병부대와 함께 2월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다 4월 영양군의 호항동(互項洞), 진보군의 서면 황곡(黃谷)에서 교전을 벌인 끝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5월 3일 안동의 임동면 대곡리에서 대장 박인화(박처사)가 교전 중 밀정에 의해 피살당하자, 의병부대는 구심점을 잃고 말았다. 박인화 사후 7월 말경 안동에 잠입하였다가 박학실(朴學實)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당시 안동경찰분서장 경부 사사키 도라히코(佐佐木寅彦)는 7월 29일 작성한 보고서에서 안동 임동면 수곡 출장 중, 배회하던 10여 명의 의병이 안동을 배회하는 것을 체포하였다고 보고했다. 이후 이른바 「내란」 죄로 기소되어 1908년 9월 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형(流刑)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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