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위도
金渭道1920. 9. 4 ~ 1989. 6.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결심대(決心隊)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결심대의 대왕산 죽창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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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20년 9월 4일 경상북도 경산군(慶山郡) 남산면(南山面) 송내리(松內里)에서 아버지 김성백(金成伯)과 어머니 이임순(李林順)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창씨개명으로 금성위도(金城渭道)를 사용하였다. 송내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4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경산군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이 일제의 강제 동원을 거부하고 집단적, 조직적으로 벌인 징용, 징병 거부 운동, 이른바 결심대(決心隊)의 대왕산 죽창 의거(大王山竹槍義擧)에 참여하여 결심대의 1소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수탈하는 전시 동원 체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특히 인적 수탈인 강제 징용과 징병은 1944년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경산 지역의 경우에도 이미 강제 징용이 무더기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1944년 6월 남산면 남산국민학교에서는 징병 1기와 2기의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산면 사월리 출신 박재달(朴在達) 등이 남산면 청년들을 규합하여 일제에 항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7월 5일부터 7월 15일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모임을 가졌다. 1944년 7월 8일 열린 2차 모임에서 사월리 청년들을 비롯한 산양리(山陽里)의 김임방(金任方), 남곡리(南谷里)의 최외문(崔外文) 등과 함께 송내동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7월 15일 산양리의 최순한(崔順瀚)과 함께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에 참가하여 대왕산에 입산, 일제에 항거하기로 한 29명 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44년 7월 25일 밤 남산면 사월(沙月)·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26명의 청년과 함께 출발하여 26일 새벽녘에 대왕산에 도착하였다. 박재달 등 정보 연락대 3인을 제외하고 대왕산에 오른 26명의 청년은 ‘결심대(決心隊)’를 조직하여 편제를 갖추었다. 이 때 1소대 소대장 성상룡(成相龍) 휘하에 편제되어 투쟁하면서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3차례에 걸친 일제 경찰의 공격을 물리치고, 주재소 파괴와 주재소 주임 살해, 식량 공급 및 진지 이동 등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식량 공급대가 일제 경찰의 감시망에 걸려 붙잡혔고, 1944년 8월 9일 식량 공급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대원들과 함께 하산한 후 은신하였다. 8월 13일까지 모든 대원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이른바 보안법과 ‘폭력 행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4년 10월 14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17일 소송이 취하되어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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