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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渭祚

渭祚

1892. 2. 30 ~ 1964.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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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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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統營)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통영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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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7)

관련 사건

  • · 김기정징토시민대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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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7) 1892년 2월 30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통영면(統營面) 대화정(大和町)에서 태어났다. 1926년 통영에서 변호사로 경남 도평의원(道評議員)으로 활동하던 김기정(金淇正)은 도평의원회 회의에서 1개 면에 보통학교 하나씩을 갖추도록 하자는 일면일교(一面一校) 계획에 반대하며 “기존의 학교만으로도 넉넉할 뿐 아니라 조선인에게는 보통학교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나면 여러 가지로 사상이 악화되어 위험한 경우가 많으니 보통학교가 필요없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도평의원회에 배치된 한국인 통역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였다. 김기정의 발언은 1927년 3월 15일 김원석(金元錫)이 그를 성토하는 징토문(懲討文)을 통영 시내에서 배포하면서 알려졌다. 이틀 후 청년 유지 수십 명이 모여 조사위원 5명을 다른 지역에 사는 도평의원에게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설 것을 결의하였다. 3월 25일에는 경남 각 군의 도평의원에게 조사한 결과를 공개하는 김기정징토문진상보고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사위원들이 김원석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밝히고 도평의회의 관련 속기록을 낭독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600여명은 즉각 김기정징토시민대회를 조직하고 임시의장에 박봉삼(朴奉杉)을 선출하였다. 김기정징토시민대회측은 결의문을 채택하여 모든 통영 사람에게 김기정과 절교할 것을 촉구하고 김기정에게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하기로 천명하였다. 또한 김기정의 죄상을 전국적으로 알리고자 김기정징토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날 곧바로 열린 김기정징토시민대회 실행위원회는 시민대회 결의문을 인쇄하여 배포할 것과 3월 27일 오후 2시에 성토강연회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성토강연회는 물론 4월 8일에 열린 예정이던 시민대회보고회 역시 경찰의 금지로 열리지 못하였다. 김기정은 시민대회 관련자들을 고소하였다. 1927년 5월 9일 박봉삼·김원석을 포함하여 시민대회 관련자 12사람이 통영경찰서에 구치되었다. 이들은 단식을 하며 항의하였고 가족들과 지역 유지들은 민정회(民正會)를 조직하고 시민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에 금지당하였다. 5월 12일에는 검속자 가족들과 시민들이 통영경찰서와 김기정의 집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에는 단식으로 목숨이 위험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에 3~4천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통영경찰서에 돌을 던졌고 김기정의 집을 급습하였다. 이때 김기정 집안에 들어가 김기정을 구타하는 데 가담하였다. 무장한 경찰 100여 명이 동원되어 시위를 해산시켰다. 다음날인 5월 14일 마산경찰서는 혐의자 검거에 나서 남녀 4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 중 22명이 5월 26일 검찰로 송치되었으며 6월 5일에는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27년 11월 20일부터 열린 재판에서 이른바 소요·상해죄로 징역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다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4년 5월 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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