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元植
元植1889. 8. 28 ~ 1940. 1.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 · 정의부
- · 한족노동당
- · 재만농민호조사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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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1889년 8월 2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금계동(金溪洞)에서 부친 김종락(金鍾洛)과 어머니 안동 김씨(金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字)는 계서(繼緖), 호(號)는 소창(笑蒼)이다. 어려서 가산(柯山) 김형모(金瀅模)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김형모는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종손이자 영남 유림의 거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었다. 14세가 되던 1902년 대구에서 1년간 측량학교를 다니며 신학문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이상룡(李相龍)이 만주로 망명한 후 그와 연락이 닿고 있던 김용환(金龍煥) 등과 가깝게 지내며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상황을 접하고 있다가 1919년 1월 망명을 결심하고 그 해 4월경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浦)에 도착하였다. 1919년 12월 30일 한족회(韓族會) 학무위원 자격으로 신흥무관학교 제4회 졸업식에 참석하였으며,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통의부의 활동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 8월에는 이세영(李世永)·신팔균(申八均)·황학수(黃學秀) 등과 함께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를 조직하고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간도참변(間島慘變)으로 고아가 된 한인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부득이(不得已)』라는 선전문을 배포하여 한인사회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4년 3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를 재정비하기 위한 전만통일주비회(全滿統一籌備會)가 개최되어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이 착수되었다. 이 회의에는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통의부(統義府)·의성단(義成團)·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고본계(固本契)·학우회(學友會) 등이 참석하였다. 그 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12월 31일자로 통합을 알리는 선언문을 발표할 때, 양규열(梁奎烈)·이탁(李沰)·이진산(李震山)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정의부가 결성되자 간정원(幹政院) 비서장(秘書長)으로 활동하였다. 간정원은 중앙집행위원장을 보좌해 각종 기밀과 인사에 관한 총체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로 법령의 발표, 공보의 간행, 추천인물의 자격조사, 공훈자의 차등을 정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1926년 10월 24일 제3회 정의부 중앙의회가 개최되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7년 12월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사령관 오동진(吳東振)이 체포된 후에는 내무부 중앙행정위원과 중앙판사위원을 겸하였다. 1924년 8월에는 동향(同鄕)인 안동 출신의 김응섭(金應燮)이 판스현(盤石縣)에서 결성한 농민단체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창립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6년 3월 9일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족노동당은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1925년 11월 5일 개최된 중앙총회 이후에는 기관지 『농보(農報)』에 사회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나타냈다. 1928년 2월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으로 당의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변경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조봉암(曺奉岩)·최원택(崔元澤)·윤자영(尹滋英)을 중심으로 주허현(珠河縣) 일면파(一面坡)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하자 그 해 초가을 판스현에서 김상덕·김광민(金光民)과 함께 도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1일에는 만주를 방문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지린성(吉林省) 동대문 밖 대동공사(大同公司)에서 재만농민호조사(在滿農民互助社)가 조직되자 김이대(金履大)·현정경(玄正卿)·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 4월 15일에는 지린성 신안촌(新安村)에서 개최된 제1회 대표자회의에 정의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약 52명의 좌·우익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만주지역에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한 회의였으며, 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표현단체로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1928년 4월에는 김동삼과 함께 북만의 신민부(新民府)를 방문하고 3부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28년 5월 12일부터 5월 26일까지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全民族唯一黨促成會議)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당을 조직하는 방법론을 두고 단체본위조직론(團體本位組織論)과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 등으로 나뉘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김동삼·지청천·김상덕(金尙德) 등의 정의부 소수파와 김좌진을 비롯한 신민부 군정파, 김승학(金承學) 등 참의부(參議府) 다수파 및 일부 공산주의 세력과 함께 개인본위조직론을 지지하는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促成會派)에 가담하였다. 좌·우 연합을 통한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이 난관에 부딪치자 9월에는 다시 3부 통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정의부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였으나 이 회의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지청천·김동삼·김상덕 등과 함께 정의부를 탈퇴하였다. 1928년 12월 하순에는 김응섭의 집에서 유일당촉성회파가 중심이 된 혁신의회(革新議會)가 조직되자 김동삼이 의장을 맡고 자신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새로운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 남만(南滿)에서 국민부(國民府)가 결성되고 혁신의회의 중요 인물들이 근거지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자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한인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이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7월에 지청천·홍진(洪震)·이장녕(李章寧)·신숙(申肅)·남대관(南大觀) 등이 북만주 위허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관내지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1930년에는 유호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上海韓國獨立運動者同盟)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11월에는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에서도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13일에는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法界)에서 전 국민부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을 만나 만주지역의 정정(政情)과 독립운동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7월에는 난징(南京)에서 김상덕과 함께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는 방략에 대해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11월에는 재만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의 통합 논의를 주도하였는데 홍진과 함께 난징에서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尹琦燮)과 연병호(延秉昊)를 만나 회담을 갖고 1934년 2월 양당을 통합한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새로 결성된 당에서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의 중앙위원장은 홍진, 총무위원장은 윤기섭, 군사위원장은 지청천이 맡았다. 1934년 가을 무렵부터는 베이징(北京)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 입교생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김두천(金斗千)에게 서신을 통해 만주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입교생의 모집을 의뢰하여 한일광(韓一光)·홍원보(洪元普) 등이 모집원이 되어 만주 각지에서 18명의 학생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두천과 한일광이 이들에게 조회장(照會狀)을 주어 그에게 보냈으며, 면담을 거친 후 다시 지청천에게 보내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던 것 같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에게 탐지되어 20여 명의 관련자 중 11명이 체포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9명 중 김정국·허삼룡·최종범·최경웅·장서훈·한석규 등 6명은 군관학교에 입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1937년까지 베이징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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