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윤영

金允永

1922. 12. 5 ~ 1977. 4. 19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윤영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북 경성(鏡城)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경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삼천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평양사단학병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22년 12월 5일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경성면(鏡城面) 수성동(壽星洞)에서 아버지 김상필(金尙弼)과 어머니 윤순악(尹淳岳) 사이의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忠州)다. 최영인(崔英仁)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1940년 3월 북간도 룽징촌(龍井村)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1년 이와테현 모리오카시(岩手縣, 盛岡市) 소재 이와테현립 모리오카야간중학교(岩手縣立盛岡夜間中學校)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43년 졸업 후 도쿄(東京) 무사시노(武藏野)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1학년 재학 중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일본 군대에 강제 징병되어 그 해 12월 함흥검사장에서 학도지원병 전형검사를 받았다. 이후 1944년 1월 25일 평양 교외 추을에 주둔하는 평양사단에 입대하여 조선 제42부대 산상대(山上隊)에 배치되었다. 부대 내무반에서 한국인 학도지원병들은 일본인 고참병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면서 강압적인 징병에 대한 강한 불신과 부대 내에서의 모멸적 언동, 사적 제재 등으로 점차 민족의식을 품게 되었다. 특히 1944년 6월 18일 간부후보생 채용시험 결과 한국인 학도병의 합격률이 11%에 지나지 않아 일본군 상층부가 한국인 학도병을 믿지 않아서 부당하게 차별적 처우를 한 것이 명백해졌다. 1944년 7월 전 부대원들이 모이는 오락회 시간에 「봉선화」 와 「사비수(泗沘水)」 를 불러 동기생들에게 민족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중순 부내 내 민족 차별 등 불만이 고조되자 42부대 내에서 부대 탈출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김완룡(金完龍)·최정수(崔正守)·전상엽(全相燁)·박성화(朴性和)와 자주 모여 일본군으로 끌려가 죽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싸워서 죽음을 이기자고 결의하였다. 42부대는 출신지나 소속 중대에 따라 몇 개의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다. 1944년 8월 초순경 김완룡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밀결사 ‘삼천당(三千黨)’이 결성되어 책임부서 인선과 조직이 착수되자 선전을 담당하였다. 함북 출신들로 구성된 참모부의 제1지대에 소속되었다. 당원의 강령은 “1. 우리는 주의 사상을 초월, 오직 3.1 정신을 받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원수의 일본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2. 우리는 중지를 모아 직간접으로 일본 군부를 내부로부터 교란, 일본의 패망을 추진한다. 3. 우리는 힘을 모아 무장봉기하고 사태가 여의치 못할 땐 백두산으로 들어간다. 4. 우리의 최종목표는 오직 독립이요, 자치권이나 참정권 따위는 고려의 여지가 없다” 등이었다. 부대 탈출 전략과 전술에 대하여 수차례 회의한 결과 전상엽 등 급진파의 주장은 평양사단 병영 폭파였지만 탄약과 폭약 입수가 어렵고 인원이 부족한 문제가 있었다. 다른 주장은 먼저 부대 탈출 후 한만 국경지대나 함남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자는 것이었는데, 이에 탈출 후 게릴라전을 벌이고 기회를 보아 평양사단을 폭파하자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최고지휘자 김완룡 휘하에 참모부를 두고 참모부 아래에 42부대원으로 편성된 제1지대와 44·47·48·50부대원으로 편성된 제2지대를 두었다. 여기서 제1지대 최정수 지대장 아래 제5분지대를 맡았다. 탈출 시점은 달이 밝고 은폐가 용이한 시기인 10월 1일 추석 밤 12시로 정해졌고, 개별적으로 부대를 탈출한 뒤 양덕의 북대봉 기슭에 집합하고서 밤에 행군해서 최종 목적지인 함남 혜산군 보천보에 도착해 항일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음악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나팔수로서 거사 당일 정해진 기상시간보다 이른 새벽에 기상나팔을 불어 일본군을 교란시켜 연병장으로 유인해 토벌하는 전술에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8월 25일부터 사흘 간 대규모 기동훈련이 잡혀 부대원 절반이 함남 부전고원으로 떠나게 되어 부득이 거사일이 11월 1일로 연기되었다. 9월 1일부터 14일까지 42부대의 제2회 경기관총 수업병 집합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우연히 병사(兵舍) 뒷길로 말을 끌고 가는 무사시노음악학교 동창인 47부대 김세균(金世均)을 만나게 되었다. 김세균을 통해 47부대 내부의 학도병 동정을 들었고 상호 간에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9월 중 47포병부대 노영준이 추을헌병대에 있는 동창 임영호를 만나 탈출 계획을 알려주고 협조를 부탁했는데, 뜻밖에 임영호의 밀고로 학도병들이 헌병대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9월 25일 김완룡이 일본인 상관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평양학병의거 계획의 전모가 드러나서 10월 24일 관련자 모두 적발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옆구리에 큰 인두 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1945년 6월 10일 평양군관구 임시군법회의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