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在善
在善188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남상목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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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서울 삼청동(三淸洞)출신이다. 1908년 판결문에 당시 24세로, 1885년생인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를 호위하는 대한제국의 신식 군대인 시위대(侍衛隊)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1907년 7월 광무 황제가 일제의 압력으로 퇴위 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서울의 시위대(侍衛隊)와 지방의 진위대(鎭衛隊)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가 전개되었다. 시위대 해산 후 가택에 은거하다가 신문을 통해 전국적인 거의(擧義) 소식을 듣고 “나라의 형세가 병들고 쓰러져 국권이 기울어져 가니 국민된 자로서 잠잠히 보아 넘길 수 없다”라고 하며 김태동(金泰東)·송주상(宋柱祥)·김경화(金景化)·이시영(李時永) 등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1907년 (음)7월 경 동지들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수원(水原) 산성사(山城寺)에 머문 뒤, 수원 출신의 강춘선(姜春善)과 함께 용인군(龍仁郡) 천곡(泉谷)으로 이동하여 의병장 남상목(南相穆)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구식 총 40자루와 양총 10자루로 무장한 50여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남상목 의진의 좌익(左翼)을 지휘하게 되었다. 같은 달 충북 음성(陰城)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하고 잔여 병력 30여 명과 함께 죽산(竹山) 칠장사로 이동하여 100여 명의 의병으로 조직된 전봉규(全奉奎)와 민병찬(閔丙贊) 의병부대와 연합하게 되었다. 연합 부대는 안성(安城)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적에게 획득한 무기 배분을 두고 전봉규 및 민병찬 의진과 분규가 벌어졌다. 이에 1907년 8월 초 상경하였다가 1908년 (음)3월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08년 7월 20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流刑) 15년을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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