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金載豊

載豊

1897. 11. 20 ~ 1962. 8. 16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載豊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풍산(豊山)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풍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독립군비단
  • · 광정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0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1) 1897년 11월 20일 함경남도 풍산군(豊山郡) 웅이면(熊耳面) 양평리(楊坪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재풍(金在豊)이다. 가족관계와 성장과정은 자료의 한계 상 알기 어렵다. 1920년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으로 이주하였다. 1920년 창바이현에는 일반 한인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함경도 출신 민족운동가들도 대거 망명하였다. 창바이현은 많은 계곡과 협곡으로 이루어진 산간지역이었다. 때문에 농사를 지을 농토를 만들기에는 많은 수고가 따랐지만, 항일무장 활동을 수행할 독립군 근거지를 구축하기에는 알맞은 곳이었다. 이 같은 지역적 특징 때문에 1919년 만세운동 후 여러 개의 독립군단(獨立軍團)이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성립되었다. 창바이현에 정착하자 곧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주도해 설립한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가입하였다. 군비단은 1919년 이은향(李殷鄕)·이태걸(李泰杰)·이동백(李東白) 등이 앞장서 설립한 독립군단이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설립 초기 창바이현 17도구(道溝)에 본부를 설치하고, 단장 이은향 밑에 군사·재무·참모·경찰·문화·외교·소집·공창부 등이 편제된 조직 체계를 갖췄다. 이 같은 군비단의 군사부 소속 8소대장에 임명되어 국경을 넘어 국내 진입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초 군비단은 보다 효율적인 항일전을 위해 주변의 독립군단들과 연합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 시기 창바이현에는 군비단 외에 대진단(大震團) 지단(支團)·태극단(太極團)·흥업단(興業團) 지단·광복단(光復團) 등이 함께 항일 무장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 독립군단들 대표들은 그 해 1월 15일 창바이현 16도구에 있는 대진단 사무실에 모여 연합규약(聯合規約)을 합의하여 제정하고 독립군연합회(獨立軍聯合會)를 결성하였다. 규약의 내용은, 각 군단의 대표들이 매달 15일 만나는 통상회(通相會)를 개최할 것, 각 군단에서 신체 건강한 자들을 선출해 통합 암살대를 구성할 것, 각 군단이 협력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공동으로 무기를 구입해 공급할 것, 각 군단내의 독립군들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에 보내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할 것 등이었다. 규약 제정과 함께 연합회는 간부를 선출하였다. 이 같은 규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연합회는 1년 가까이 체제를 유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통제와 구속력이 약한 연합회만으로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이에 군비단은 1922년 2월 흥업단과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성립시켰다. 하나의 조직체가 되어 강력한 통솔력을 가져야 보다 효율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대한국민단이 성립되자 군사부 소속의 부원이 되었다. 대한국민단 지휘부는 이후 약 2개월간 나머지 주변 군단들의 지도부와 계속 논의를 이끌어가 그 해 4월에는 창바이현 내 모든 단체가 통합한 광정단(光正團)을 성립시켰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대규모 통합 독립군단을 결성한 것이었다. 광정단은 창바이현 17도구 동평덕리(東坪德里)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통합에 가담한 군단 중에는 창바이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린장(臨江)·푸숭현(撫松縣)에도 기반을 가진 것들이 있었다. 따라서 광정단은 린장현에 서부(西部), 푸숭현에 북부(北部) 지부를 만들고 본부에는 남부(南部) 지부를 함께 설치해 세 현(縣)에 근거지를 구축한 독립군단이 되었다. 지방 조직에 속하는 이들 지부 밑에는 서(署)와 구(區) 등의 하부 기관이 설치되었다. 본부에는 재무·군사·서무·경호·의사(議事)·권업(勸業)·문화·통신·회계·위생부 등의 부서를 편제하였다. 성립 초기 조직을 이끌 단장은 윤덕보(尹德甫)(이명 윤병용(尹秉庸))였다. 이 같은 광정단의 군사부 소속 하사(下士)에 임명되었다. 광정단은 의용대를 따로 편성하지 않고 군사부와 경호부 소속의 대원들이 항일 무장활동을 수행하였다. 1922년 9월 초 김경근(金敬瑾)·김황담(金璜橝) 등과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한 모연대를 결성해 국경을 넘었다. 북청·홍원·단천군 등 함남 지역 부호들의 집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갹출할 계획이었다. 9월 16일 동지 김황담의 형제인 북청군 가회면(佳會面) 중리(中里) 김형담(金瀅橝)의 집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이후 며칠간에 걸쳐 북청군 내 부호들의 집을 기습적으로 들어가 상당한 액수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 기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김형담의 집 뿐 아니라 또 다른 형제 김봉담(金琒橝)을 비롯해 한원숙(韓沅)숙·정군선(鄭君善)·한표열(韓杓烈)·주수석(朱壽石) 등의 집에 번갈아 체재하며 활동하였다. 이 같이 주의를 했지만 거금을 탈취당한 부호들의 신고가 있자 일제 경찰대가 곧 추적해 왔다. 모연대는 일단 다음 목적지를 포기하고 본부로 귀대하기 위해 창바이현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귀로 중 김형담이 일제 경찰의 총을 맞고 체포되어 나머지 두 명만 돌아 올 수 있었다. 그 해 말 최광수·강재구 등 두 명의 대원과 또 다시 3인조 모연대를 결성하였다. 이번 목적지도 지리를 잘 아는 함경남도 지역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며칠간에 걸쳐 목적한 바의 금액을 군자금으로 모았다. 세 명의 대원 모두 무사히 본부로 귀대하던 중 창바이현과 접한 국경지방 혜산진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그곳 혜산진경찰서 소속 한국인 순사 김종락을 처단하였다. 김종락은 독립군을 공격하고 추적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고, 체포된 독립군을 인정사정없이 고문하였다. 독립군이 국내로 진입하는데 큰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다. 1924년경에는 소대장이 되어 관뎬현(寬甸縣)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이 시기 단장 윤덕보는 그 자신이 직접 관뎬현으로 가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특수 중대를 편성해 대대적 국내 진입을 계획하였다. 이때 특수중대에 소속되어 단장과 함께 국내진입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이 준비한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자료의 한계 상 알기 어렵다. 1924년 하반기 광정단은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南滿洲)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통의부(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성단(義成團) 등 다른 7개 단체와 통합에 합의해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는 하얼빈에서 어무현(額穆)을 거쳐 북간도(北間島)까지 선을 그어, 그 이남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기반으로 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단체였다. 정의부는 이들 한인의 생계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자치조직과 항일활동을 위한 무장조직 등 크게 두 개의 기구를 편성하였다. 자치조직은 민주공화정 체제인 3권 분립에 입각해 중앙행정위원회·중앙의회·중앙심판원 등을 구성해 만들고, 무장조직은 의용대를 편성하였다. 또 중앙의 자치조직과는 별도로 총관(總管)·지방(地方)·구(區) 등의 지방조직을 만들어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사회를 관할하였다. 광정단이 정의부로 통합된 이후, 이 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일제의 문서에는 나온다. 하지만 세부적인 활동사항이나 행적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