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琦
正琦1872. 11. 29 ~ 1944. 6.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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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4)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송학리(松鶴里) 출신이다. 1872년 11월 29일 태어났다. 1919년에는 정산면 대박리(大朴里)에 거주하였다. 1919년 청양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청양군 백곡리(白谷里) 주민인 홍범섭(洪梵燮)은 서울에 체류하던 중, 독립선언서를 읽어보고, 자신의 고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귀향하였다. 평소 친분이 있는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과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함께 읽고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의 장날인 4월 5일을 거사 날짜로 잡고, 사람들에게 배포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시위 주도자들은 4월 5일 오후 3시 경부터 정산시장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정산시장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일제 헌병이 출동하였으나, 홍범섭·임의재 등은 정산시장으로 재진입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정산시장에서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만세 시위에 동참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은 만세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하였다. 점차 군중은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들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헌병은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고,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는 다음날 더 큰 규모의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4월 6일 아침, 주민들과 함께 순국한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하여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 고인의 자택으로 운구하기 위해 헌병주재소 앞으로 갔다. 운구 행렬의 선두에는 권영진(權寧鎭)이 쓴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과 다수의 만장(輓章)이 줄을 이었고, 운구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노제를 올리면서 많은 주민들이 행렬에 합류하여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행진하였다. 권흥규의 운구가 만세시위의 성격을 띠게 되자, 일제는 공주 주재 헌병을 급파하였고,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들은 운구 행렬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 상여꾼 김국삼(金國三)과 유행길(柳行吉)·장응렬(張應烈)·윤광원(尹光遠)등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제 헌병대는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3일 동안 진행된 일제 헌병의 검거 과정에서 붙잡혀, 1919년 4월 24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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