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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업

金正業

1882. 3. 26 ~ 1927.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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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정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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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임실(任實)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임실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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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임실군 둔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2년 3월 26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삼계면(三溪面) 삼계리(三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임실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긴 시간 옥살이를 하였다. 임실군 둔남면 신기리에 거주하던 이기송(李起松)은 평소 독립을 희망하던 차에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이기송은 귀향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3월 23일의 오수리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준비를 진행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 이기송 등은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서 행진을 펼쳤다. 일제 경찰이 출동해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 연행하자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갔다. 8백여 명이 넘는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앞에서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겁에 질린 일본인 경찰들이 이기송을 석방하였고, 이에 더욱 사기가 오른 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와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일행은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로 돌아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상점에 들어가 상점 건물과 상품을 파괴하고 다시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뒤 면장과 면서기 등을 끌어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후, 다시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때 군중의 선두에서 솔선하여 주재소 문과 유치장의 유리창을 부수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는 투쟁을 주도하였다. 한국인 순사보가 총을 겨누고 위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김용식 등과 함께 총을 빼앗은 뒤 순사를 주재소 밖으로 끌어내어 구타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날 저녁 남원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급보를 받고 출동해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그 뒤에 붙잡혀 1919년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 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여 그 해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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