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云
正云1872. 12. 7 ~ 1950. 9.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72년 12월 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역촌리(驛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청양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서울에 체류하고 있던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은 종로(鐘路)의 여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읽어 보고,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인식하였다. 이에 그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갖게 되었다. 귀향한 홍범섭은 만세운동의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이전부터 교류가 있던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서울에서 가져 온 「독립선언서」를 함께 읽고,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협의하였다. 이후 만세운동 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추가로 합류하였다. 이들은 4월 5일 정산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시위 당일 군중들에게 배포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등 구체적인 만세운동 준비를 하였다. 4월 5일 정산시장으로 나간 홍범섭 등은 오후 3시 경부터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정산시장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일제는 곧바로 정산헌병분견소의 헌병들을 출동시켜 만세시위를 강압적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홍범섭, 임의재 등이 지휘하는 시위대는 이에 맞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완강하게 맞섰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시장 곳곳을 행진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에 다수의 주민들이 동참하기 시작하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에 즉시 해산을 명령하면서 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하였다. 일본 헌병의 강압적인 진압에 분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이들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당황한 일본 헌병은 해산을 종용하면서 군중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가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권흥규의 사망은 다음날 대규모의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주민들과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하여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 고인의 자택으로 운구하기 위해 헌병주재소 앞으로 갔다. 운구행렬의 선두에는 권영진(權寧鎭)이 쓴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과 다수의 만장(輓章)이 줄을 이었고, 운구가 지나가는 길목의 각 마을마다 노제를 올리면서 많은 주민들이 합류하였다. 운구 행렬은 1천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고,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는 시위 대열이 이어졌다. 일제는 정산의 헌병만으로는 진압이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고 공주 주재 헌병을 정산으로 급파하였다. 공주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들은 권흥규 운구행렬을 목격하고, 즉시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대는 정산에서 3일 간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당시 정산에는 옷에 황토 흙이 묻은 사람은 모두 시위 가담자로 인정하여 체포한다는 소문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옷을 갈아입었는데, 그 후에는 또 옷을 갈아입은 사람은 수상하다고 하여 잡혀갔다고 한다. 이때 일본 헌병에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로 끌려갔다. 1919년 4월 26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이후 삶에서 특별한 활동은 보이지 않으며, 1950년 9월 2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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