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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칠

金貞七

1890. 11. 15 ~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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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정칠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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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삼수(三水)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삼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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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3)

관련 사건

  • · 신흥군 신흥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3) 1890년 11월 15일 함경남도 삼수군(三水郡) 강진면(江鎭面) 소농리(小農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함남 신흥군(新興郡)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2일부터 8일까지 함흥군(咸興郡)에서도 만세시위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신흥군의 만세시위는 지리적·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던 함흥의 만세시위에 영향을 받았다. 함남 중부에 위치한 신흥군은 함흥군과 홍원군(洪原郡)·장진군(長津郡)의 일부를 합쳐 1914년 새롭게 만든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흥군의 만세시위는 정씨 문중의 사숙(私塾)이던 일서재(一書齋)를 개명한 길명의숙(吉明義塾)에서 근대 학문을 가르치던 정재각(鄭在珏)에 의해 준비되었다. 함흥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정재각은 3월 9일 동고천면(東古川面)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유춘갑(柳春甲)에게 신흥공립보통학교(新興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학련(鄭學鍊)에게는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1919년 3월 9일 아침 7시 30분경 우편국 앞에 모인 군중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바로 출동한 경찰들의 저지로 인해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해산한 시위대는 그 날 9시경 신흥공립보통학교 운동장 주변에 재집결하였다. 이에 150여 명의 학생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신흥헌병분견소 앞으로 행진하여 일제의 통치를 규탄하고 분견소에 돌을 던졌다. 이에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3월 10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유춘갑과 정학련의 주도로 신흥공립보통학교 학생 170여 명은 동고천면 일대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500여 명의 주민들이 합세하였다. 이때 시위대와 함께 3월 9일 유혈 사태를 일으킨 헌병들을 응징하기 위해 신흥헌병분견소로 가서 선두에 서서 돌을 던지며 분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19년 12월 2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1년이 확정(미결구류일수 20일 본형 산입)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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