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玹坤
玹坤1900. 3. 3 ~ 1955. 1. 2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정읍군 태인면 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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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0년 3월 3일, 전북 정읍군(井邑郡, 현 정읍시) 태인면(泰仁面) 태흥리(泰興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태인면(泰仁面) 박산리(朴山里)에 거주하였으며,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고종의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태인면에 사는 송수연(宋洙連)·박지선(朴址宣) 등과 함께 상경하였다. 서울에서 이들은 전라도 출신인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등과 만날 수 있었다. 이 만남에서 3월 1일 서울에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계획되어 있음을 전해 듣고 「독립선언서」를 받아서 태인면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다른 청년들과 함께 태인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시위 계획을 주도하며 송한용(宋漢鏞)·송진상(宋鎭相)·오석흥(吳錫興)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거사일은 3월 16일 태인 장날로 정하였다. 3월 12, 13일경 밤 신기선(辛基先)과 함께 근무하던 태인면사무소의 비품인 등사판을 이용하여 손병희(孫秉熙) 등 33인이 연서한 「독립선언서」 약 300매를 등사, 인쇄하였다. 3월 16일이 되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정오를 기다렸다가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먼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자 이에 군중이 호응하였다. 학생들과 청년들이 잇달아 시위에 참여하면서 군중은 곧 수천 명이 되었다.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노점을 철수한 뒤 만세행렬에 가담하였다. 수천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제 경찰과 헌병은 당황하였다. 헌병과 보조원이 주재소 앞에서 군중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구타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구타로 인해 군중의 분노가 격해졌으나 일제 관헌의 제지가 강해지면서 만세 대열은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7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방해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그 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는 상고를 기각하여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이후에도 김진호·박지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이들은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연락원과 접촉하였고 정읍·영광(靈光)·고부(古阜) 등지에서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금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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