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정범

金貞範

1899. 9. 4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정범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북 초산(楚山)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초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통의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9)

관련 사건

  • · 초산군 동면 향령산(香岺山) 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9) 1899년 9월 4일 평북 초산군(楚山郡) 동면(東面) 화풍동(化豊洞)에서 태어났다. 가족관계와 성장과정은 자료의 한계 상 정확히 알기 어렵다. 1922년 (음)5월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南滿洲)로 넘어가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 남만주 독립운동계는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시기였다.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본군들에게 당한 경신참변(庚申慘變)(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의 피해를 힘을 합해 복구하고 항일 독립전쟁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1919년 만세운동 후 서북간도(西北間島) 지역에 성립된 수십 개의 독립군단들은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해 일본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일본은 1920년 10월 초, 약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켜 독립군기지는 물론이고 이주한인사회를 초토화시켰다.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수의 인원이 살해되고, 많은 한인의 가옥·학교·교회 등이 파괴되어 한인사회의 기반이 무너졌다. 일본군이 물러 가고난 뒤 남만주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모두의 힘을 모아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22년 1월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결성하고, 그 지휘하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한단(光韓團) 등이 통합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성립시켰다. 이어 그 해 8월에는 정성을 기울여 통합운동을 실천한 결과 17개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탄생시켰다. 1922년 (음)5월에 남만주로 가 독립운동단체의 단원이 되었으므로 통군부의 대원이 되었거나, 가입하도록 권유한 인물이 대한독립단의 간부였던 최석순(崔碩淳)이었으므로 대한독립단에 가입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독립단은 통군부 성립 시 일부가 이에 가담하고, 나머지는 통의부가 성립될 때 또 다시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통의부에는 대한독립단 세력 대부분이 가담하게 되었다. 이 같은 과정으로 그 해 8월 통의부가 성립되자 구성원 중 1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의부는 성립 목적이 경신참변으로 파괴된 한인사회 재건과 항일독립전쟁의 수행 두 가지였다. 따라서 조직 또한 크게 자치활동을 수행할 자치조직과 독립전쟁을 수행할 무장조직 두 갈래로 구성되었다. 두 기구를 총괄해 책임질 총장으로 김동삼(金東三)이 선임되었다. 자치조직으로는 민사·교섭·군사·재무·학무·법무·교통·실업 등 행정조직과 사법기능을 가진 사판부(査辦部), 입법기능의 의회(議會)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1개 대대와 5개 중대, 유격대와 헌병대로 구성된 무장조직인 의용군이 설치되었다. 의용군 사령관으로는 김창환(金昌煥)이 임명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 같은 통의부의 의용군 대원이 되어 동료 양덕순(梁德淳) 등 3명과 유격대를 편성해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였다. 초산군 남면(南面) 창평동(倉坪洞)으로 진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본부로 귀대하였다. 이 국내진입 활동을 전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6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유격대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초산군 동면 화풍동으로 들어갔다. 군자금 모집 목적으로 화풍동의 친일 부호 집을 향해 가던 중 향령산(香岺山) 산중에서 일본 경찰대를 만나 접전을 벌였다. 유격대의 피해는 없었으나 일본 경찰의 피해 또한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귀대하였다. 그런데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탄생한 통의부는 성립된 해인 1922년을 채 못 넘기고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통의부 성립을 논의할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파괴된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하루빨리 재건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어 각자가 추구하는 이념과 노선은 누구든 주장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조국을 광복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오직 그것에 충실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22년 10월 조국을 독립시키면 다시 왕정(王政)을 실시하자는 복벽주의(復辟主義)계 인사들과 공화정(共和政)을 실시하자는 공화주의(共和主義)계 인사들이 충돌하였다. 양측은 서로 물리적 충돌까지 일으킨 뒤 복벽주의계의 전덕원(全德元)·채상덕(蔡相悳) 등이 1923년 2월 의군부(義軍府)를 설립해 분리해 나가고 말았다. 이러한 분열이 있고, 1923년 말부터는 항일 무장투쟁을 적극 주장하는 의용군의 지휘관 중 일부가 통의부 탈퇴 움직임을 보였다. 의용군 제1중대장인 채찬(蔡燦, 일명 백광운(白狂雲))과 김원상(金元常) 등이 1923년 말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들은 임시정부의 인사들을 만나 무장활동을 수행할 독립군들로만 단체를 만들어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이 되기로 합의하였다. 이 같이 결정하고 남만주로 돌아 와, 1924년 5~6월경 통의부를 탈퇴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의용군 제1·2·3·5 중대와 유격대, 독립소대를 분리해 이탈하였다. 통의부를 빠져 나온 이들 독립군 병력은 압록강변의 지안(輯安)·퉁화(通化)·환런현(桓仁縣)을 근거지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켰다. 참의부를 성립시킨 인물들은 통의부가 자치활동에 너무 치중한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재만(在滿) 독립군의 근본 바탕이 되는 이주 한인사회를 이끌고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 단체의 근본 목표가 조국을 독립시키는 것이었으므로 무장활동에 더욱더 충실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초기 초대 참의장은 성립을 주도한 채찬이 제1중대장을 겸임하며 맡았고, 제2중대장에 최석순, 제3중대장에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에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에 김창천(金蒼天), 독립소대장에 허운기(許雲起), 훈련대장에 박응백(朴應伯) 등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자치활동을 위해서는 오직 민사부만 설치하여, 이주한인을 관할하고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 각 지역의 애로 사항을 중앙이 간파할 수 있도록 지역의 대표들로 구성된 중앙의회도 구성해 설치하였다. 최석순의 권유로 독립군단에 가입하였고, 또 통의부에서도 그를 따라 활동해 왔기에 통의부에 남지 않고 참의부 대원이 되었다. 참의부에서의 활동 또한 최석순의 지휘와 지시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제2중대 대원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참의부가 성립하자 곧 1924년 5월 14일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였다. 참의부 대원 수명과 유격대를 구성해 이전에 군자금모집을 위해 진입한 바 있는 초산군 남면으로 들어왔다. 그 지역의 부호로 소문난 창평동에 거주하는 원천주(元天冑)의 집으로 가 군자금 18원을 모금하였다. 그 해 5월 30일에는 남면 송묘동(松廟洞)에 거주하는 부호 이정식(李鼎植)의 집을 기습해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군자금을 청구해 47원을 받아냈다. 이 같은 국내진입 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체포 대상이 되었다. 수많은 재만 독립군들이 국내로 진입해 군자금모집 또는 일제의 기관을 공격해 피해를 입혔지만, 모두 검거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원이 파악되어야 되고, 피해가 어느 정도 커야됐다. 결국 계속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1932년 8월 22일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남만주 지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 서차수중동(西岔水中洞)에서 붙잡혔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9년 가까운 기간 옥고를 겪다가 1941년 6월 15일 풀려났다. 이후의 행적은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