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在範
在範1900. 9. 28 ~ 1931. 3.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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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0년 9월 28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사곡면(舍谷面) 화전동(禾全洞)에서 김성낙(金成洛)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이명으로 김재범(金載範)을 썼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가사를 돌보다가 기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도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게 되었다. 17세가 되던 1916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는 한편, 선교사들과 선배들을 통해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대구 남성교회(南城敎會) 목사 이만집(李萬集)은 3월 2일 이갑성(李甲成)이 보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2백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3월 8일 오후 3시 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우선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과 장로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埰)·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을 참여시키기로 하였다. 당시 계성학교 3학년 학생으로 기숙사에 거주하던 중 이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학교 학생인 여규진(呂奎鎭) 등을 동참시키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제작 등 사전 준비에도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8일 오후 서문시장에는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 등 대구 지역 학교의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만집이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침여한 시민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이재인(李在寅)·허범(許範) 등 계성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기를 앞세우고 일제 경찰과 기마대의 저지선을 뚫고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일제에 붙잡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항소하여,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학업을 계속하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서울 연희전문학교로 전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그 뒤 가정 형편상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안동 경안학원(慶安學院)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대구애락원(大邱愛樂園)에 근무하는 한편, 대구 동촌(東村)에 정착하여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31년 3월 1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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