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혁
金大爀1875. 9. 24 ~ 1973. 4.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서화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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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75년 9월 24일에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서화면(瑞和面) 죽본리(竹本里)에서 태어났다. 시위를 주도할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평남 서남단에 위치한 용강군은 동쪽은 중화군과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서쪽은 서해, 남쪽은 황해도 은율군(殷栗郡)·안악군(安岳郡), 북쪽은 강서군(江西郡)에 접하고 있다. 용강군은 기독교가 일찍 전파된 곳이었으나, 농촌에는 천도교인이 많았다. 용강군의 독립 만세 시위는 장날을 이용하여 기독교회나 천도교구가 있거나 기독교인이나 천도교인이 많은 마을에서 일어났다. 3월 2일 용강면과 지운면(池雲面) 진지동(眞池洞)에서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3월 3일 진지동에서 다시 독립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진지동교회(眞池洞敎會) 이정규(李正奎) 목사의 주도로 기독교인들이 고종봉도식(高宗奉悼式)을 올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4일에는 서화면(瑞和面) 죽본리(竹本里)에서 마을 사람들이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김준국(金俊國)으로부터 독립 만세 시위를 권유받고 김대엽(金大燁)과 함께 석치리(石峙里)에 위치한 신흥학교(新興學校)에서 학생 30여 명을 이끌고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죽본리와 석치리를 돌면서 행진하였다. 자복리에서 3월 6일에 일어난 시위에는 김두원(金斗源), 김홍세(金弘世), 장병삼(張炳三)의 지휘 하에 신흥학교 학생 30여 명이 참여하였다. 김치선(金致善)이 인솔한 서당 학생 15명과 합류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순사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른 뒤 주재소 문과 처마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서화면 일대에 검거 선풍이 불면서 3월 4일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붙잡혔다. 1919년 4월 7일 평양지방법원 진남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19년 5월 8일 평양복심법원이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자 상고하였다. 상고할 때 이유서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평등주의가 풍미하는 가운데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속령이 된 나라는 민족자결에 의해 독립을 원하는 대로 처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도 독립한다고 믿고 있던 차에 마침 독립선언서가 반포되고 각처에서 만세 소리가 들리니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 만세를 부른 것뿐이니 한민족으로서 한국 독립을 외친 것은 무죄다’라고 항변하였다. 1919년 6월 5일 고등법원 형사부가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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