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규
金炳奎1890. 3. 19 ~ 1967. 12.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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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90년 3월 19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철산면(鐵山面) 동부동(東部洞)에서 태어났다. 평북 서부에 있는 선천군은 동쪽은 정주군과 구성군, 서쪽은 철산군, 북쪽은 구성군·의주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황해와 서해와 마주하고 있다. 일찍부터 기독교와 천도교가 전파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극적인 지역이었다. 선천군의 독립 만세 시위는 선천면에 자리한 신성학교(信聖學校) 학생들에 의하여 처음 일어났다. 신성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였다. 3월 1일 서울과 동시에 평양과 선천에서의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한 이승훈(李昇薰)은 신성학교 성경 교사인 홍성익에게 신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부탁하였다. 홍성익은 학교 근처에 있던 남교회(南敎會) 목사 김석창(金錫昌)과 신성학교 교원이던 김지웅(金志雄)·양준명(梁濬明) 등과 준비회의를 열고 만세 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김지웅은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행진을 위한 깃발을 만들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신성학교의 종이 울렸다. 150여 명의 신성학교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나아가 나가 행진을 시작하며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이때 미리 연락을 받았던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 60여 명도 합류하였다. 학생들은 남교회와 북교회를 거쳐 선천면 중심지로 나가는 동안 시위대에 가담하여 행진을 주도하였다. 본격적인 시가 행진이 시작되면서 시위대는 선천군청과 선천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시가를 돌았다. 일본군 선천 수비대가 기마경찰대와 함께 출동하면서 학생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자 일본군이 즉시 발포하여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던 기수 강신혁(姜信赫)이 총에 맞아 절명하였다. 이 자리에서 붙잡혔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19년 6월 3일 평양복심법원은 항소를 기각하자 상고하였다. 상고 이유서를 통해 ‘한국이 강제적 보호조약과 불합리한 합병에 의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연방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식민지로서 학대를 받고 있다’라고 비판하면서 ‘한국인이 다른 민족의 지배를 저주하며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사상을 키우는 가운데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일본 정부도 민족자결주의를 인정하였기에 독립 만세를 부른 것’이니 징역형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12일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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