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식
金炳軾1872. 12. 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1872년 12월 9일 함경남도 풍산군(豊山郡) 이인면(里仁面, 후일 풍산면으로 개칭) 원포리(院浦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직업은 농업이다. 종교는 천도교이며, 교내에서 풍산 지역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풍산군에서는 지역의 천도교인들이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1919년 3월 10일 이인면 원포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맹시정(孟始楨)과 함께 3월 1일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주도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과 만세 시위가 전개된 소식을 강희준(姜熙俊)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맹시정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천도교 풍산교구의 중심인물인 천남면 동대리(東坮里)의 박인진(朴寅鎭)을 초대하여 풍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3월 14일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4일 이인면 신풍리(新豐里)에 있는 천도교 풍산교구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 이날 모임에 강한철(姜漢掇)·김창영(金昌英)·맹시정·박인진·장세급(張世岌)·주두칠(朱斗七)·주진표(朱鎭豹)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200여 명의 천도교인은 한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를 한 후, 맹시정이 교구실 앞뜰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어서 김창선(金昌善)과 박인진이 독립 연설을 하였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모여 있던 천도교인이 호응하며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풍산헌병분견소 헌병이 교당 안으로 진입하여 천도교인을 해산하려 하였다. 시위대는 헌병의 진압에 맞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 앞으로 가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헌병의 무력 탄압에 맞서 시위대는 헌병분견소로 진입하였고, 기물을 부수고 병기(兵器)를 탈취하려 하였다. 이에 헌병이 발포하였고, 그 과정에 2명의 사망자와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헌병의 무력진압으로 시위대는 오후 4시경 해산하였으나, 26명이 체포·구금당하였다. 이때 붙잡혔다. 1919년 열린 1심 판결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미결구류일수 60일 본형 산입)과 벌금 30원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상고하였지만,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