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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보

金順甫

1871 ~ 1909.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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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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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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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1) 1871년에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북상면(北上面) 운곡리(雲谷里)에서 출생하였다. 집안 및 성장과정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09년을 즈음한 시기에 본인의 마을에서 소속을 알 수 없는 의병부대에 가담한 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안내 역할을 맡아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으며, 내정 또한 통감부에 의해 장악되었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를 가속화한 것은 1907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이었다.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하여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망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제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일본에 저항하는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청양군은 충남 지역에서도 특히 의병운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그 연원은 1895년으로부터 시작한다. 을미사변 이후 청양군 화성(化城) 출신의 유생인 안병찬(安炳瓚) 등이 홍주군(洪州郡) 출신의 김복한과 함께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다. 1906년 홍주의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일본에 대항했던 것도 안병찬·채광묵(蔡光默)·이세영(李世永) 등 청양 출신의 인물이었다. 1909년에도 의병 전쟁의 열기는 지속되었다. 이에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고자 했던 일본은 자신들의 계획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던 의병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청양 일대의 의병은 이전보다는 그 세력이 약해졌으나, 여전히 활발한 의병운동이 전개되던 지역이었다. 이에 1909년 대대적인 의병 탄압에 나선 일본 또한 이 일대에 대한 군사행동을 본격화하였다. 일본군과 공주경찰서는 정산군 방면에 약 30여 명의 의병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정산헌병분견소 등과 협의한 후 우선 헌병 1명, 헌병보조원 3명, 순사 3명을 수색대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다시 헌병 1명, 헌병보조원 4명, 순사 3명을 증파하여 수색에 나섰다. 이러한 수색을 기반으로 일본군 헌병대 선발대는 10월 1일 오후 9시경 청양군 북상면 운곡리에서 27명의 의병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의병들은 일본군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20분 간의 교전 끝에 청양군 본상면 구제동에 사는 이 모(24)와 평양 남부면 조조에 본적을 두고 있는 김춘화(40) 등 2명의 의병이 일본군에 사로잡혔다. 이들 의병을 안내하다가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곽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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