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산
金水山1910. 6. 14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병인의용대
- · 한국독립당
- · 화북한교선무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6.10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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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0년 6월 14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평안동(平安洞)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으로는 수산(守山)·익성(益星)·영산(永山)·익흥·용정·무영·운서 등이 있다. 1926년 융희황제(隆熙皇帝)의 장례일을 기해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진주농고에서 동맹휴교를 주동하였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6·10만세운동의 계획에는 임시정부 인사들도 일정하게 관계하였다.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융희황제의 장례일에 맞추어 국내 의거를 추진하였고, 상하이(上海)에서는 7월 16일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함께 김규식·송병조·이유필·정인교·강경선·최석순·곽헌·황훈 등의 발기로 삼일당(三一堂)에서 6·10만세운동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안창호는 6·10만세운동이 자각적으로 일어난 것임을 강조하고, 동학농민운동과 독립협회의 근대적 개혁운동에서 시원을 이루며,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6·10만세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호위, 주구배 숙청 등을 목적으로 하는 병인의용대 대원으로 입대하였다. 병인의용대는 1926년 1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임시정부 외곽단체 겸 의열투쟁 단체로, 임시정부 경무국장 나창헌(羅昌憲)을 중심으로 한국노병회 회원과 정위단(正衛團) 단원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다. 병인의용대는 세 차례에 걸쳐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폭파 시도, 일제 밀정 등 처단, 국내의 일제 관공서 파괴와 반일시위를 전개하였다. 1933년 말경 한국독립당으로 흡수되면서 해산되었다. 1927년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중국군에 입대하였다. 1929년 포병 관측통신반장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 5월 난징포병학교(南京砲兵学校)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중포대(重砲隊) 연습대(練習隊) 특무장(特務長)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한국독립당 난징지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상하이 지역에 5개의 구회와 난징구(南京區)·난징특구 등 모두 7개의 구회를 조직하였고, 광둥(廣東)에는 지부를 설치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거로 항저우(杭州)로 이전한 후에는 이전보다 많은 구회와 지부를 설치하여 항저우구회와 항저우특구회를 비롯하여 상하이지부·광둥지부·베이징지부·난징지부 등이 설치되었다. 1933년 8월 상하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유인발의 사살 계획을 세우고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일로 그해 9월 8일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쑤저우감옥(蘇州監獄)에 수감되었다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인도 문제를 둘러싸고 중·일 간의 충돌이 일어났지만, 1935년 11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독립당 카이펑(開封)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화북한교선무단(華北韓僑宣撫團)의 구호조 주임으로 교포의 구호와 환국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자료에 따르면 1974년 5월 20일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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