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목
金德穆1913. 5. 10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인성학교
- · 흥사단
- · 용진학회
- · 한국청년전위단
- ·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13년 5월 10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에서 김붕준(金朋濬, 1888~1950)과 노영재(盧英哉) 사이에서 3녀 1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아버지는 김붕준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고, 여동생 김효숙(金孝淑, 1915~2003)과 김정숙(金貞淑, 1916~2012)도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아버지 김붕준이 한국독립당 광둥(廣東)지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가족들과 함께 광저우(廣州)로 옮겨갔다. 광저우에서 중산대학(中山大學) 법학원 경제과에 입학하여 1937년 9월 김창화(金昌華)·안병무(安炳武) 등과 함께 졸업하였다. 중산대학에 다닐 때인 1933년 3월 이정호(李貞浩)·김창국(金昌國) 등과 함께 유학생들의 친목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용진학회(勇進學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학생항일구국회·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여 항일 의식 고취·대적선전·장병 위문 등의 활동을 하였다.1919년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7년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교민들과 임시정부 요원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세운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제7회로 졸업하고, 강만(江灣)체육중학교와 명강대학(明强大學)을 다녔다. 1931년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던 흥사단(興士團)에도 입단하였다. 흥사단은 1913년 실력양성을 통해 민족부흥을 위한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취지로 안창호가 구상해 창립한 단체이다. 이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 직후 박화산(朴華山)·차균찬(車均燦)·장현근(張鉉瑾)·김덕근(金德根)·박제도(朴濟道)·박제건(朴濟建)·장상국(張相國)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혐의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같은 해 5월 14일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7년 2월, 김창만(金昌滿)·김용(金鏞)·이흥관(李興官, 이명 마초군(馬超軍)) 등과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을 조직하였다. 한국청년전위단은 한국국민당청년단의 안우생(安偶生)·김인(金仁)·이재현(李在賢)·한도명(韓道明) 등이 광저우에서 조직하였으며, 김구(金九)가 주도하던 한국국민당의 조직과 세력을 확대하려는 한국국민당의 전위조직이었다. 이 단체의 기관지로 『전선(前線)』을 발행하며 활동하다가 1937년 9월 한국국민당청년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1938년 8월 한도명과 함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제4분교 제9총대(總隊) 보병과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인 1939년 11월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였다. 1940년 5월 제16기로 졸업하고, 중국군사위원회 군령부(軍令部) 첩보참모 훈련반에 들어갔다. 훈련반에서 7개월 동안 첩보 교육을 받고 1940년 12월 25일 졸업하였다. 1942년 8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 군령부 상위(上尉)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첩보참모로 파견한다는 발령장을 받았고, 다음 날인 8월 16일에는 중국군사위원회 판공청(辦公廳) 특검처(特檢處) 제3과 과원(科員)에 임명되었다. 특검처는 서신 검열과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이후 광복 때까지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중국군사위원회와 광복군 총사령부의 연락을 담당하는 한편,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과 후방 공작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이범석(李範奭)이 결성한 조선민족청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77년 7월 2일 서울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고,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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