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보
姜基寶1905. 2. 10 ~ 1935. 8. 2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공산당
- · 조선청년총동맹
- · 평양청년동맹
- · 고려공산청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905년 2월 10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영변면(寧邊面) 서부리(西部里)에서 태어났다. 강영철(姜榮哲)이라고도 불렸다. 1925년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자 소련으로 피신하였으며, 여기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녔다. 하지만 수학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1926년 평양으로 다시 돌아와 창전리(倉田里)에 소재한 평양고아원(平壤孤兒院)의 상무로 활동하였다. 10월 3일 평양면옥노동조합(平壤麵屋勞動組合) 주최로 열린 평양편리화직공조합(平壤便利靴職工組合) 발회식에서 축사하였다. “오늘날의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노동자의 자유평등 사회를 건설하자”라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는데, 이를 전해 들은 평양경찰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재판에 회부되어 1926년 12월 10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1927년 2월 7일까지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7년 10월 평양에 소재한 양말직공청년(洋襪職工靑年), 고무직공청년 등 5개 청년 단체를 통합하여 평양청년동맹(平壤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평양청년동맹을 결성한 배경 또한 신간회의 연장선에 있었다. 즉, 종전의 고립적이며 분산적인 성격의 청년 단체를 없애고 대중의 역량을 총집결시킬 수 있는 청년 단체를 운영하자는 것이 평양청년동맹의 설립 목적이었다. 여기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출옥 이후 조선청년총동맹에 몸담았다. 조선청년총동맹은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성향 청년 단체였다. 하지만 1925년 말과 1926년 여름에 있었던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검거 사건으로 인해서 사회주의 청년운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11월 정우회선언, 1927년 2월 민족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합동 전선의 결과물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청년총동맹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27년 6월 17일 집행위원회 간담회를 열고, ‘서면대회(書面大會)’라는 형식을 통해서 종전의 규약을 개정하고, 조직을 개편하였다. 즉, 종전의 무산계급 청년운동에 국한되었던 것을 전 민족적 청년운동으로 운동 노선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는 도연맹, 각 면에는 지부, 각 리에는 반을 설치하였다. 정혁(鄭革)과 함께 평안남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평양청년동맹과 신간회 평양지부에서 활동하던 중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하필원(河弼源)을 만나려고 1927년 서울 신당리(新堂里)로 갔다. 하필원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평안남북도 책임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30년 12월 경기도 경찰부 소속 경찰들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예심 결과 1931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 공판 회부가 결정되었다.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가까운 옥고를 겪고 1933년 2월 28일에 출옥하였다. 잦고 긴 수감 생활에 지쳐서 황해도 배천읍(白川邑)에서 요양하였다. 하지만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35년 8월 21일 31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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