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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진

金麗鎭

185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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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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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수안(遂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수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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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2) 1854년경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오동면(梧桐面) 상구리(上九里)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천도교인으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황해도 동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수안군은 1910년 천도교 교구가 설치되었다. 1914년 대교구제가 실시되자 곡산교구, 신계교구 등과 함께 서흥대교구에 편제되었다. 수안군은 주변의 곡산군(谷山郡) 등과 함께 황해도 천도교의 중심지역 중 하나로 수안군의 만세 시위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곡산의 천도교인 이경섭(李景燮)은 1919년 2월 28일 천도교 중앙총부의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과장이자 보성사(普成社) 사장인 이종일(李鍾一)로부터 황해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3월 1일 저녁 수안에 도착한 이경섭은 수안교구 평의원이자 공선원(共宣員)인 이종숙(李宗淑)의 집에서 수안 지역 천도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수안교구 교구장인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하여 김영만(金永萬)·홍석정(洪錫禎)·홍순걸(洪淳杰) 등 전 교구장, 그리고 공선원 나찬홍(羅燦洪)과 최용식(崔鎔植), 전교사(傳敎師) 한청일(韓淸一) 등이 참석한 이 회합에서 이경섭은 독립선언서 100여 매를 전달하였다. 3월 1일을 기해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이니, 수안 지역에서도 독립선언서를 군내에 널리 배포하고 서울처럼 만세 시위를 전개하라는 이종일의 지시를 전해들은 수안의 천도교 지도부는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일 시일(侍日)을 맞아 안봉하·이달하(李達河)·이영철(李永喆)·나용일(羅龍日)·홍두옥(洪斗玉)·홍석정·김영만·나찬홍·최용식·한청일 등은 수안교구 교구실에서 회합하였다. 그리고 3월 3일 천도교인들을 모아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 독립을 선언했으므로 헌병 분대를 인도(引渡) 받을 것, 그리고 그 실행 방법은 한청일과 홍석정이 담당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거사 전에 수안헌병 분대에 탐지되었다. 이로 인해 3월 2일 오후 안봉하·김영만·최용식·나찬홍 등 수안 지역 천도교 지도부 11명이 교구실에서 붙잡혀 수안헌병 분대로 연행되었다. 이때 검거를 모면한 이영철·한청일·홍석정 등은 당일 밤 수안 지역의 천도교 중심인물들과 연락을 통해, 계획대로 3일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임을 알렸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수안교구에는 대천면(大千面)·수안면·연암면(延岩面) 등에서 이영철·최양봉(崔陽鳳)·차제남(車濟南)·한청일·홍석정 등 130~140명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수안금융조합 사무소를 거쳐 수안헌병 분대 앞마당까지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한국은 독립하였으며 자유와 공화정치는 대세임을 주창하였다. 또한 수안헌병 분대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수안헌병 분대장이 서울 본부의 명령을 받아야 하니 일단 물러갈 것을 요청하자, 시위대는 강국보(康國甫) 외 1인을 대표자로 남기고 교구로 돌아왔다.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1차 시위였다. 교구에는 다시 100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여 만세 시위에 나섰다. 이때 시위대와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헌병 분대로 행진하였고, 오전 11시경 헌병 분대 앞에서 헌병 분대의 인도와 물러날 것을 다시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2차 시위였다.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청일과 홍석정은 선두에 서서 150여 명의 교인을 이끌고 오후 1시경 헌병 분대 앞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김병령(金炳領)·양석두(梁石斗) 등과 함께 헌병 분대로 돌진하여 문간에 설치된 장애물을 제거하고 헌병대의 퇴거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3차 시위였다. 이에 헌병대는 다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시위를 주도하던 한청일과 홍석정 등이 사망하였다. 3월 3일 전개된 수안읍 2차, 3차 시위 과정에서 9명의 사망자와 1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붙잡혔는데, 이때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관할재판소를 경성지방법원으로 결정하였고,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 저택 침입죄로 항소 불수리 처분을 내렸고,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3개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형기 산입)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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