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
金文鎬1911. 1. 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국광복군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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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911년 1월 5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백림(栢林)에서 출생하였다. 해주보통학교와 해주동중학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37년 중국에 가서 각지를 유랑하다가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에서 중국군에 체포되어 심문받던 중, 중국인 와세다대학 동창생을 만나 1940년 6월부터 중국 제3전구 사령부에서 정치부 설계위원으로 복무하였다. 포로 심문과 선전공작에 참여하다가,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찾아갔다. 1941년 3월 1일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에 거행된 광복군 징모(徵募) 제3분처 성립식에서 주임 겸 선전조장에 임명되어, 한도명(韓道明, 훈련조장)·이지일(李志一, 정보조장)·신정숙(申貞淑, 회계조장)·강치명(姜治明)과 함께 중국군 제3전구의 중심지인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 파견되었다. 이때 대원들과 함께 제3지대 편성을 위한 활동을 준비하며, 각종 선전물을 갖고 절강성 천태현(天台縣)으로 나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제1유격 정진군종대(挺進軍縱隊) 사령부와 합작하여 일선공작을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염전사상고취 전단 및 일본군 귀순통행증 등을 화물차에 싣고 운반하는 와중 야전 방송기재를 휴대하고 출동하여 선전물을 살포하며 일선방송을 하거나,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적군 점령지역에 공중 살포하는 등 활약이 이어졌다. 광복군 병력 모집과 선전공작 임무를 맡아 6개월간 징모 활동을 벌여 23명을 모집하였다. 『유주일보(柳州日報)』 1941년 4월 17일자에 실린 한진원(韓鎭源)의 「조선인의 입장에서 본 삼민주의」에 의하면, “한국인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한국광복군 동남지대의 징모 업무 담당하고 있었다”라고 한다. 1942년 10월 1일 징모 3분처가 제2지대 3구대 3분대로 개편되면서 분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1월 24일 이소민(李蘇民) 구대와 더불어 3분대가 제3전구(장관 구주통[顧祝同])에서 활동하였다. 중국 측 자료에 “김문호와 상급자인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은 계통이 달라 평소 의견 충돌이 빈번하다. 김문호는 공산당 계열로 분류되는 이소민과 서로 한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어, 이 지역 한국광복군의 내홍이 심각하다”라고 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에 합류한 조선의용대와 갈등을 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945년 3월 31일 시점에서 이끌던 3분대가 젠양(建陽)에서 활동하였음이 확인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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