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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金永南

1926. 11. 16 ~ 2021.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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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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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和順)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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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진해일본해군병영 방화계획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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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이양면(梨陽面) 율곡리(栗溪里) 출신이다. 1944년 7월 18세의 나이에 강제로 진해 해군 해병대에 입대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 제정된 「국가총동원법」 을 적용하여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시키기 시작하였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 를 실시하여 16,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1943년 7월에는 「해군특별지원병제도」 를 실시하여 진해 해병단에 입단시켰다. 「해군특별지원병제」 에 의해 1944년 4월 1일부터 해방 직전까지 12,166명의 한국인이 일본 해군으로 동원되었다. 해군지원병은 진해경비부의 해병단으로 입대하여 훈련 후 일본·만주·남양군도 등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또한 일제는 「학도지원병제」 를 실시하여 전문학교 이상 학생들을 전쟁터로 강제 연행했으며, 1943년 3월에 징병제를 공포하고 그 해 8월부터 징병제를 실시하여 징병검사를 통해 1944년 9월부터 1945년의 일제 패망 때까지 입대 인원은 최소한 18만 4,000명 이상인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1944년 위와 같은 일제의 강제 병력 동원정책에 의해 진해 해군 해병대로 배치되었다. 해병대 입대와 훈련 과정 중에 항일운동을 결심하고 동지 5명을 규합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병영에 방화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가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탈출하는 것이었다. 진해 해군기지는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에 있었던 일본 제국 해군의 경비부로 일본 본토를 방비하고 해군부대의 본거지로 ‘조선’ 내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군사 요지 중 하나였다. 이러한 군사 요충지 안에서 항일운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활동이었다. 그만큼 감시망도 치밀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비밀리에 추진하였던 병영 방화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경비부(警備部) 헌병대(憲兵隊)에 붙잡혀 1945년 3월 22일 진해경비부(鎭海警備部)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사세보해군형무소(佐世保海軍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본의 패전으로 1945년 10월 9일 사가(佐賀)의 좌하소년형무소(佐賀少年刑務所)에서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이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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