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일
康文一1911. 3. 2 ~ 1967. 7.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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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5) 1911년 3월 2일 전라남도 제주도 애월읍(涯月邑) 하귀리(下貴里)에서 강성휴(康性休)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한학을 공부한 후 1922년 이웃 마을에 있는 사립 일신(日新)학교에서 1년간 배웠다. 192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 있는 금구소학교(金歐小學校) 야간부에서 5년 동안 공부하였다. 졸업 후 전기제작소 공원으로 일하던 중 일본 공산당 당원 김귀영(金貴榮)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에 크게 공감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무산 아동에게 항일 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데에 박영순(朴榮淳)과 뜻을 같이하며 사회주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신병으로 1933년 귀국하여 8월에는 박영순과 함께 하귀리 2구에 무인가 야학을 설립 운영하였다. 학생들에게 식민 통치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는 한편,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듬해 12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고자 김홍규(金弘奎)·김을봉(金乙鳳) 등이 하귀리 1구에서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하였다. 통합 후 60여 명의 학생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항일 의식을 효과적으로 고취하기 위한 활동의 하나로 이천만가(二千萬歌)·혁명가·단결가 등을 가르쳤다. 일련의 항일 활동으로 동지 50여 명과 체포되어 4개월 취조 끝에 8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박영순·배두봉(裵斗奉)·김을봉·김홍규 등과 함께 구속되었다.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기까지 약 8개월 동안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중국 상하이와 일본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광복이 되자 귀국하였다. 애월읍 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7년 삼일절 기념 시위 사건으로 미 군정에 의해 검거되었다. 석방 후 하귀리의 단국중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재임하던 중 좌우익의 갈등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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