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永喆
永喆1898. 10. 27 ~ 1987. 7.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민족대동단
- · 대한독립애국단
- ·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0)
관련 사건
- · 조선민족대동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0) 1898년 경상북도 영일(흥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대현은 10만원의 자산을 지닌 부농이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졸업 후 1914년 봄 서울로 올라와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에 들어가 1917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韓偉健)이 3월 1일 아침 학교 강당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2학년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나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남대문 밖으로 나왔다가 서대문으로 들어가 종로에 이르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3월 5일에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한 남대문 앞의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의 최익환을 만난 것은 만세운동이 확산되던 1919년 3월이었다. 조선민족대동단은 과거 친일 경력을 지닌 최익환(崔益煥)과 전협(全協)이 잘못을 뉘우치고 만든 독립운동 비밀단체였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만세운동에 나서는 것을 보고,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규합해 독립운동 구심체를 조직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선언문」, 「진정서」, 「방략과 기관」 등의 각종 선전물을 제작해 각처에 배포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일제를 상대로 「경고문」, 「일본 국민에게 고함」 등의 선전물을 제작했으며, 선전물을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와 미국 대통령에게도 전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선전물 배포를 담당자가 필요했는데, 최익환의 요청으로 국내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이 무렵 서울에는 조선민족대동단 외에도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과 같은 비밀단체가 있었는데, 1919년 5월 대한독립애국단장 신현구(申鉉九)의 권유로 동단에도 가입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처음에는 자생적으로 생겨난 비밀단체였으나,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면서 임시정부의 국내조직인 연통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대한독립애국단의 주된 역할은 조직 확대와 임시정부 선전, 군자금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19년 5월경 선전물을 배포하는 과정에서 조선민족대동단의 실체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권태석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옥중에서 고초를 치르다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범죄처벌령,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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