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군
金演君1889. 10. 7 ~ 1943. 8.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의민단
- ·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부 간북남부총판
- · 조선민단
- · 중정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89년 10월 7일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성천면(成川面) 하부리(下部里)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에 귀의하여 근대식 교육을 받았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3·1운동에 호응하여 같은 천주교 신자인 방우룡(方雨龍)·김종헌(金鍾憲) 등과 북간도 왕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의민단(義民團)을 창설하고, 부단장을 맡았다. 의민단은 룽징촌(龍井村)의 상부지(商埠地)를 비롯한 간도 전역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왕칭현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유럽제 무기를 반입하였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간도에 간북(墾北) 남부총판과 북부총판을 설치하자, 간북남부총판의 참사(參事)로서 무장투쟁 역량을 결집하는 데 진력하였다.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대첩에 참전한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북만주 닝안현(寧安縣)의 닝구타(寧古塔)에 은거하였고, 1921년에는 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방우룡 등과 한반도 내 일본군 시설을 공격하기 위한 폭탄을 제조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1923년 2월 12일 한인 청년이 중국인 경관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약연(金躍淵)·윤화수(尹和洙)를 비롯한 한인 사회 지도자들과 함께 중국 관헌 측에 재발 방지를 요구하였고, 2월 26일부터 2월 28일까지 개최된 간도주민대회에서 집행위원 5인 중 1명으로 선출되어, 재만 한인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또 룽징촌 내에서 독자적인 행정·치안 체계를 가진 조선민단(朝鮮民團) 설립을 추진하여, 집행위원의 일원으로 일제 총영사관과 중국 옌지도윤(延吉都尹)을 상대로 조선민단의 장정(章程) 승인을 설득하였으나, 통치권의 약화를 우려한 중국과 일본 측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동시에 재만 한인들의 실력 양성과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해성중학교(海星中學校) 교사 신분으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재만 한인들의 계몽 및 복리 증진 사업에 투신하였고, 1927년에는 김규복(金圭復)·박윤하(朴潤夏)·홍석찬(洪錫燦) 등과 계몽단체인 중정회(中正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을 맡았다. 간도 한인사회와 가톨릭 신자 모임의 원로로 활동하던 중 1943년 8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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