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
金永根1879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제국 시위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5)
관련 사건
- · 대한제국 군대 해산
- · 정미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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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5) 충청남도 정산군(定山郡, 현, 충남 청양군 정산면) 길상리(吉祥里) 출신의 대한제국 시위대(侍衛隊) 퇴역 군인이다. 1907년 당시 29세였으므로 1879년생으로 추정된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시위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퇴역하였다. 이후 서울에 거주하면서 의병에 참여하려 했으나 그 계획이 발각되어 붙잡혔고, 유형(流刑)을 받았다. 1907년은 일제의 강제적인 광무황제 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정책이 노골화되는 시기였다. 이때 광무황제를 호위하고 궁궐의 시위를 담당했던 대한제국 시위대 군인들이 갖는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은 특별하였다. 일제는 1907년 8월 서울에 황궁 호위 1개 대대만 남겨두었다. 그래서 당시 소속이 1907년 근위대(近衛隊)로 기록되었다. 일제는 군대를 축소시킨 것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완전히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을 방위하는 시위대의 소요 사태를 예방할 필요가 있었고, 그 일환으로 서울 주둔 일본군의 병력을 늘리고 화약고를 점령해 두기까지 하였다. 결국 1907년 8월 1일, 일제는 순종(純宗)에게 강요하여 얻어 낸 문서를 기반으로 삼아 훈련원(訓鍊院)에서 해산식을 연 후 대한제국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군대 해산 조치에 분개한 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하면서 1연대 1대대, 2연대 1대대 장병들을 중심으로 한 1,800여 명의 병력은 해산식에 불참하였다. 이후 이들은 인근의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면서 항전을 시작하였고, 해산식에서 무기를 빼앗긴 군인까지 합류하여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때 시가전에 참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후 강제로 퇴역당한 것은 확실하다. 시가전의 결과, 시위대 측은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본군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상당수의 인원은 곧바로 서울을 탈출한 후 지방의 진위대(鎭衛隊)에 합류해 군대 해산에 저항하였고, 정미의병(丁未義兵)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해산 군인인 김천복(金千福)처럼 서울에 남아 의병 합류를 도모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남대문 밖에서 건축 일을 하면서 김천복 등과 함께 수진궁동(壽進宮洞, 지금의 서울시 안국동 일대)의 거처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에 퇴역 군인으로 친하게 지내던 홍인태(洪仁泰) 등과 연락하면서 의병 합류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충청남도 온양의 사광천(史光千)과 연락을 취함으로써 의병에 합류할 방법을 찾았고, 사광천의 집을 방문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광천을 만나지 못해 의병 합류에 실패하고 다시 서울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의병 합류 계획을 파악하게 된 일제 경찰은 수진궁동의 하숙집을 습격하였으며, 미처 피하지 못하고 김천복·박계문(朴桂文)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07년 11월 30일 당시 상급법원에 해당하는 평리원(平理院)에서 김천복·박계문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군인 신분인 관계로 이른바 내란죄(內亂罪)를 적용받아 유형(流刑) 5년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신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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