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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경

金斗璟

1910. 7. 2 ~ 1937.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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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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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제주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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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제주청년동맹
  • ·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 ·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
  • ·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
  • ·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 사건
  • ·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910년 7월 2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제주면(濟州面) 건입리(建入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철초(鐵草)이다. 부친은 한성전보사 주사를 지낸 김병원(金炳元)이고, 모친은 양갑생(梁甲生)이다. 제주공립보통학교(濟州公立報通學校)를 졸업한 후 경상남도 부산의 사립 실업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 3월 동교(同校)를 졸업하고, 제주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1년 6월 제주청년동맹 읍내지부(邑內支部)에 가입하였다. 그해 8월 경부터 제주청년회관을 드나들면서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의 책임자인 강창보(姜昌輔) 등의 지도를 받으며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1931년 9월 6일 국제무산청년데이를 맞이하여, 전날인 9월 5일 제주청년회관에서 송성철(宋性徹)과 함께 시위 투쟁을 벌이기로 하고 곧바로 선전문을 작성·제작하였다. 9월 6일 아침 청년회관에서 송성철에게 ‘제국주의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국제무산청년 단결 만세’ 등 3개 항목으로 된 선전문을 건네주었고, 각 지역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제주청년동맹 위원 부태환(夫泰煥) 등과 함께 예비검속을 당했다가 석방되기도 하였다. 이후 적극적으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1931년 10월 30일과 11월 5일에 강창보의 지시로 건입리 양동규(梁東圭)의 집에 하숙 중이던 하순철(河順哲, 일명 河哲)에게 투쟁지령서를 건네주었다. 하순철과 함께 러시아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에 산지항(현 제주항) 축항 노동자 40여 명을 지도하여 임금 인상 요구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검거된 직후 강창보 등 제주청맹원 9명과 단식투쟁을 펴서 서장 면회 등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풀려난 후 계속 축항 인부들을 대상으로 항일 사상을 고취시키며, 이기원(李基元)·방길형(方吉亨) 등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1932년 초 이른바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으로 강창보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산지항 축항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이후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 산지출장소의 사무원으로 취업한 후 원활한 축항 인부의 교양사업을 위해 그해 5월 산지 축항 노동자 김석훈(金石訓)에게 노동자 조직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1932년 5월 하순경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출옥 후 곧바로 활동을 재개하여 1932년 6월부터 7월까지 부병훈(夫秉勳)·김경봉(金京奉)·김일준(金日準) 등을 지도하였다. 이들과 함께 과거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 때 강창보 등이 채택한 조직 및 운동 방법의 오류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앞으로 각 지역별로 혁명적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배후에서 이들을 지도하여, 1933년 1월 28일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어서 3월 초순경 부병훈 등 3명을 중심으로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33년 11월 하순 김일준과 함께 신좌면(新左面)에 합법 단체인 ‘유지농사연구단’을 조직하여 농민들의 항일 투쟁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이 단체는 김신배(金申培)의 발기로 출범하였다. 한편 1933년 8월 21일 장경렬(張璟烈)의 소개로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 책임자인 여수의 정충조(鄭忠朝)를 만났다. 서로 지방의 정세를 보고하고 향후 정세와 운동 방침 등을 논의한 결과, 힘을 합해 함께 활동하기로 합의하였다. 정충조로부터 전남 지역 조직 책임자들의 회합에 참석해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회합 장소를 부산(釜山)으로 정하고 장차 발신인을 구연모(具然模)로 하여 암호로 통신연락을 하기로 하였다. 이후 1934년 2월경까지 정충조를 비롯해 ‘조선레포트 회의사건’ 책임자인 신갑범(愼甲範) 등과 몇 차례 통신연락을 주고받았다. 이와 같이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과 함께 제주도 전역에서 비밀리에 혁명적 대중조직운동을 전개해나가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4년 10월 18일부터 제주경찰서가 청년 70여 명을 일제히 검거할 때 함께 체포당했다. 이후 1934년 12월 28일 15명과 함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목포검사국에 송치된 후, 1935년 1월 7일 예심에 회부되었다. 수감 당시 당한 혹독한 고문으로 전남도립병원에 입원하였고,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회복되지 않아 결국 1936년 3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의 보석 허가를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제주로 돌아와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1937년 7월 13일 향년 2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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