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金道鉉1865 ~ 1920. 10. 27
관련 단체
- · 의군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경신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920년 사망 당시 55세였으므로 1865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7월 경 북간도(北間島) 학서동(鶴栖洞)에 거주하며, 재만 독립군단(獨立軍團)인 의군부(義軍府) 제10 이정국(理正局) 소속의 통신과장으로 활동하였다. 의군부는 간도관리사 이래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국외로 망명한 의병들을 소집해 항일활동을 주도하였던 이범윤(李範允)이 총재로 추대되어 1919년 3·1운동 후 옌지현(延吉縣) 밍웨거우(明月溝)에 조직된 독립군단이었다. 그 휘하에 사령관 김영선(金營善), 검사부장 최우익(崔于翼), 재무부장 강봉거(姜鳳擧), 서기 지장호(池將虎) 등의 간부진이 구성되었다. 1920년 7월경 의군부는 조직 기구를 검사부, 참모부, 참리부(參理部), 지방부 등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중 지방부는 본부가 있는 밍웨거우 이외 나머지 옌지현 지역을 중부로, 인접한 허룽현(和龍縣)지역을 서부로 나누어 지방조직을 설치하였다. 중부와 서부 아래에는 이정국을 곳곳에 설치하였다. 이중 중부에는 13개 이정국이 설치되었는데, 상의향(尙義鄕) 세린하(細鱗河) 중흥동(仲興洞)에 위치한 제10 이정국의 통신과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6월 4일 북간도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 유격대가 함경북도 종성(鍾城) 북방 5리 지점인 강양동(江陽洞)에 주둔한 일제의 헌병대를 공격해 격파한 후 두만강을 넘어 귀대하였다. 일제는 이를 보복하고자 아라미(新美) 중위가 지휘하는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대 1개 중대 등 2개 중대로 연합대를 구성해 독립군 유격대를 추격했다.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의 삼둔자(三屯子)지역까지 추격했지만 유격대의 흔적은 찾지 못하고 오히려 본대와 합류해 대병력을 이룬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대패하고 말았다. 삼둔자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일제는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운 후 대대병력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6월 6일 저녁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로 침입해 왔다. 야스카와(安川) 소좌가 이끄는 약 300명에 가까운 병력과 패전한 아라미중위가 지휘한 병력도 합세한 대병력이었다. 하지만 이 병력 또한 북간도의 봉오동(鳳梧洞) 골짜기까지 유인되었다가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등 독립군단들의 연합작전에 의해 전멸하다시피 패전하였다. 사망한 일본군의 수만 150명이 넘었다. 이 같이 국내와 간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일제는 전쟁에 버금가는 작전을 수행하지 않고는 독립군의 활동을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1920년 8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이란 군사적전을 만든 후, 그 해 10월 2일 만주의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사건’을 조작했다. 그리고 약 2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서북간도의 독립군기지와 이주한인사회를 향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공격해 경신참변(간도참변)을 일으켰다. 이때 미처 피신을 못하고 회령 맞은 편인 북간도지역 학서동 자택이 있는 마을에 동지들과 함께 숨어 있었다. 이 사실을 사전에 파악한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제74연대 병력이 1920년 10월 27일 마을을 급습하였다. 마을 남자들은 크게 저항하거나 일부는 급하게 몸을 피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희구(金希久)·허진세(許進世) 등 9명의 마을 남성들과 함께 희생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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